과학적 판단과 성경적 사고
< 김영규 목사·남포교회 협동목사 >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객관성 있는 사고력 증진 위해 과학의 틀 안에 있는 불편한 진실 밝혀야”
지난 6월 7일 네이처(Nature) 잡지에서 대한민국 교과부가 창조론자들의 학교 교과서 개정요구에 항복하였다는 한 페이지의 기사가 발표되었다.
위 기사에서 미국에서처럼 진화론을 믿지 않는 응답자들의 3분의 1중에서 진화론을 지지하기에 과학적 근거에 있어서 불충분하다는 입장을 가진 자가 41 퍼센트였고 나머지 39 퍼센트의 경우 진화론이 그들의 종교적 신앙과 모순되기 때문에 진화론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보고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놀랍게도 한국의 한 진화론자의 주장에 따라 한국의 대학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진화론 과학자가 5내지 10명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진부한 18세기의 과학이론인 진화론이 크게 가르쳐지고 있지만, 정작 대학에 있는 교수들 중 그런 이론을 가르치는 자는 드물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기사 자체는 네이처(Nature) 잡지가 문제점으로 지적한 기사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의 그런 변화가 오히려 미국과 같은 다른 나라의 중고등 학교 교과서의 개정에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현대 과학적 이론들은 자연의 진실성에 있어서 좀 더 엄밀해 지면서 정직해 지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창조론은 신론 차원에 있어서 신앙의 내용으로서 있는 것이고 그런 이론들의 정직성과 별개의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과학적 엄밀성이나 정직성보다 더 큰 엄밀성과 정직성에 기초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종교적 진정성에 있어서 과학적 발견들의 진정성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진정한 과학은 반드시 그런 종교적 진정성과 만난다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 사회 및 문화에 있어서 좋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것은 한국에서의 종교들에게 어떤 문제들도 있겠지만, 교육과 그 가르치는 내용 및 방식에도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인으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그 사고의 객관성과 합리성에 있어서 그 국민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아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언어 자체에 있어서 세계의 모든 민족들과 만나는 부분들이 있으면서도 독자적으로 창제된 글자가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 되어 있는 것처럼, 그 민족성과 토속성에 있어서 세계의 어느 민족들에서 찾을 수 없는 그 객관성과 합리성이 지금에도 여전히 증명되어야 한국인의 위상이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라는 세대의 교육에 있어서 그런 객관성과 합리성이 자라도록 하기 위해 오히려 지금까지 과학적 이론들의 발전에 있어서 공헌하였던 이론들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더 엄밀하게 비판하는 훈련들을 가능한 한 빨리 받으면서 대안적 객관성과 합리성을 길러내는 데 그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교육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배워야 한다. 자녀들에게 18세기 말부터 발전된 소위 다윈의 이론을 강요하는 것은 지금도 마르크스의 사회적 이론을 자녀들에게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나쁘다.
지구의 혼돈적 궤도나 우주 중심에 있어서 입자 물리학적 해석을 이해하도록 하고 과거의 공간의 개념이나 시간의 개념들을 버릴 수 있는 능력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가능한 한 물질적 질서에 있어서 고체나 액체 및 기체의 개념들을 버리도록 배워야 할 것이며 과거의 에너지 개념들도 버릴 수 있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자라는 자녀들에게 이제는 주기율표도 파괴하는 이론들도 소개해야 한다. 우주론과 뇌 이론을 결합시키고 절대속도와 정보이론들이 결합이 되어야 한다. 정치 사회의 문제들을 소수에 의한 반민주적 임면권의 도입과 국민의 직접 권리를 빼앗은 비례대표제와 결합된 정당정치나 부패된 대중정치로 푸는 것은 미래 지향적 국민권리에 대한 분명한 침해이다. 엄밀한 자기 비판능력이 없는 인간들을 생산하고 있는 교육적 환경에서 어떻게 바른 공공 인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엄밀한 자기 비판능력이 없는 종교인들의 스스로의 철저한 회개도 길게 보면 가식이고 위선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창조론은 과학적 객관성과 합리성의 극치를 표현한 것이고 삶의 질에 있어서 절대적 자체 비판능력의 단순한 경계선일 뿐이다. 현대 물리학의 몰락에서 보여준 절대적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로부터 구제되는 기초와 출발일 뿐이다.
무례한 인간들은 어떤 객관적이고 합리적 이론들을 부정하는 곳에서도 있지만, 어떤 객관적이고 합리적 이론들을 상대화시키지 못한 능력에서도 생긴다. 만물의 실재성 혹은 진실성에 대한 근본적 이해에 있어서 어떤 해결점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나 사회는 미래 인간 사회를 책임져야 할 자라난 세대에 어떤 이론들을 소개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고민의 핵심인 우주 질서의 기원과 관련해서 우주 탄생의 정보가 우주의 가속 팽창이론에 있어서 가장 멀고 가장 오래된 정보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무게와 질량을 결정하는 에너지 입자들에 대한 정보는 수집될 수 없고 나 자신의 가장 작은 세계의 정보 입자들의 세계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창조론을 믿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에너지 입자들이 마지막 질서로 펼치고 있는 색과 맛, 냄새와 소리, 감동과 선한 마음들 자체가 궁극적으로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가르치는 근거 또한 창조론이란 점이다. 창조론을 믿는 그 이상의 다른 근거들은 성경에서만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