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부흥운동과 역사적 개혁주의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과거를 교훈삼아 개혁교회의 바른 역사 세워나가야”
소위 요엘서의 ‘늦은 비’(latter rain)운동, 혹은 제2의 오순절 운동이 20
세기 초에 인도와 한국, 미국과 영국, 중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미 및
아프리카 등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 운동은 1904-5년에 걸
쳐 일어났던 초기 웨일즈 부흥운동의 뒤를 잇고 있다.
20세기에 널리 퍼진 오순절 운동
웨일즈 부흥운동은 성령으로 노래하는 일, 동시적 통성 기도, 환상과 예언,
기타 개인적 체험들이 그 특징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후 1905년부터 2년 동
안 웨일즈 장로교 선교사들의 인도 선교지역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도 눈물
의 회개운동과 고백, 장시간의 열정적 기도운동, 성령의 강한 역사에 의한
치유, 예언과 방언 및 그 통역의
역사, 그리고 전도운동이 그 부흥운동의 특
징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별히 인도의 오순절 운동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었
다는 것도 다른 특징으로 있었다.
따라서 1907-1908년 한국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도 웨일즈나 인도에서 일어
났던 사건들의 소개와 함께 이루어졌던 만큼 독립적이라고 할 수 없고 어떤
연장선에서 일어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한국에서 나타난 현상의 경우
동시 통성 기도 외에 매일 철야기도, 성경공부, 병 고치는 일, 기적의 역
사,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다른 특징으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에서나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부흥운동이 모두 초교파적으로 이루어졌
다고 할지라도 그 당시 장로교 선교사들과 후대의 대부분 학자들에 의해 그
운동들은 Ch. F. Parham의 베델 복음학교(Bethel Gospel School)를 중심으
로 1903-4년에 캔자스 시티와 미주리주로 확대된 금식과 기도를 추구하며 성
령세례와 철야예배 및 방언행위를 강조한 미국의 초기 오순절 운동의 하나
인 ‘사도적 신앙(Apostolic Faith)’ 운동의 어떤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해
석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연장선에서 해석된 한국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부흥운동이 오
늘날 강조되면 될수록 1932년 Mary Rumsey에 의해서 처음 서울에 세워진 한
국 오순절 교회의 역사적 뿌리와 같게 된다는 점이다. 그럴 경우 한국 장로
교회의 정체성에 있어서 큰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좀더 자세하게 역사의 내막을 살펴보면 또 다른 요인을 찾을 수 있
다. 1907-8년 부흥사건 이전에 적어도 치리에 관한 독립권은 없었으나 선교
사들을 중심으로 1893년부터 1900년까지 이미 독립장로교회를 설립하고자 하
는 의도를 가진 연합 공의회시대가 있었다.
당시 세례교인 3,710인, 예배처소도 287개소에 달했던 1900년부터 이미 장로
교의 고유한 치리권이 있는 공의회(조선장로교 공의회)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1902년 그 공의회가 자유로운 조선장로회의 설립을 추진할 때, 위원
회를 선정하여 조선 장로회에서 사용할 신경을 준비할 것도 결정함에 따라
해 위원회가 각국 교회 신경들을 수합하여 3년 동안 연구하였다.
그리고 1905년에야 비로소 해 위원회가 조선 장로교 공의회에 보고하여 이르
기를 “본 위원들이 새로 신경을 제정하지 아니하고 만국장로회에(서) 전부
터 사용하는
신경과 해 신경에 대한 해석과 신경도리에 대한 공포와 선교
각 지방에서 통용하는 신경을 비교하여 조선 예수교장로회 형편에 적합한 신
경을 택하는 것이 가한 줄로 인정하였사오며 이에 제출하는 신경은 몇개월
전에 새로 조직한 인도국 장로회에서 채용한 신경과 동일하되 우리가 이 신
경을 보고할 때에 희망하는 바는 이 신경이 조선, 인도 두 나라 장로회 신경
만 될 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 장로회의 신경이 되어 각 교회가 서로 연락하
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인도의 경우에도 오순절 운동과 독립적으로 1900년 9월 27일부터 연합공의회
(the Council of the Alliance) 시대가 있었고 8차례의 공의회를 개최하면
서 1904년에야 비로소 각 국의 장로교회들과 개혁교회들이 연합하는 인도 장
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India)가 탄생한 바 있었다.
물론 이런 이름을 붙이는 데도 한국에서처럼 진통을 겪었다. 그것은 감리교
와 침례교 그리고 루터교회 및 다른 교파들도 연합할 수 있도록 처음에는 인
도 그리스도 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India)라는 이름이 제안되었으
나, 특별히 스코틀란드 선교사들의 반대로 그 이름
이 채택이 되지 못하였다
고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곽안련 선교사가 말한 인도에서 몇개월 전에 채용
한 신경이란 1904년 첫 인도 장로교 총회에서 채택된 신경을 지시한다.
물론 인도 장로교의 12개 신조와 오늘날 한국 장로교의 12개 신조 사이에 번
역과정에 있어서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인도 장로교회가 신경으로 채택한
12개 신조의 채택 과정에 있어서도 문제점들이 있었다.
원래 인도에 있었던 웨일즈나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연합 공의회의 회원들
은 대부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채택을 강하게 기호하였다. 그러나 스
코틀란드 선교사들과 캐나다 선교사들이 반대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들에게
맞추어 이미 세 스코틀란드 교회들에 의해서 채택된 인도 남쪽 연합교회
(the South Indian United Church)의 고백서(11개 신조)를 중심으로 약간 개
정하여 인도 장로교회의 신조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국 장로교회가 이런 인도 장로교회의 12개 신조를 채용한 이후에
‘미국교회 신경과 같지 않은 것이 문명의 등급을 인하여 조선교회를 하대하
는 것이 아니냐’는 불평을 듣게 되었을 때 곽안련 선교사는 웨스트민스터
신경이라도 이 조선신경보다 우수하다고 하기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장로, 감리 양 교회 연합문제로 인하여 회집하였을 때 감리교파 선교사
의 말 중 “양 교회가 연합하게 되면 우리 감리파가 웨스트민스터 신경은 채
용하기가 극난하니 이 인도국에서 온 신경을 채용하기가 어렵지 아니하다”
고 한 말을 상기시키면서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인도 장로교회나 한국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초기부터 신경
으로 채택하지 못한 배경에는 이미 한국교회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초기 초교
파 오순절운동의 지속과 회귀에도 있었겠지만 선교사들의 본국 교회들의 신
학적 입장들도 큰 방해 요소들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역사적 정통
교회와 개혁교회의 바른 성경해석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이 정직하고 바르게
믿어야 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똑같은 경배의 대상으로 실체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같은 영원 전부터 단번에(semel) 동시적으로(simul) 서로 분리되거나 나눌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이요 여호와의 영이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간에 상호적 관계와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근원과 질
서 및 원인
의 관계가 있어도 피조물과 관계(작정과 창조 및 모든 섭리)에 있
어서는 항상 성부와 성자가 같은 실체적 속성들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성
령의 은밀한 역사이든 충만한 역사이든 이미 편재하신 성령은 어거스틴의 표
현대로 이미 있는 곳으로(illuc ….. ubi et ipse erat) 보내심을 받는 것
이다.
성령이 없다는 것은 성령 스스로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주시는 자로서 피조
물들에 따라 특별한 선물들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talis) 거기에 없다는 것
뿐이다. 심히 악하고 강팍한 인간들에 따라서 그의 특별한 역사와 선물들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런 성령의 선물과 역사가 꼭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는
말이 아니다.
늘 새롭게 펼쳐지는 성령의 역사
칼빈의 말대로 ‘성령은 항상 어디에서나 동일하시고 자신과 일치하시며 만
사에 시종 일괄하시되 자신과 비교되시며 자의로 말씀하시거나 역사하시지
않고 성부와 성자의 그 말씀과 그 역사를 이루시며 일단 알리신 그 말씀과
역사 안에 그러한 방식으로 영원히 머무르시기를 원하시며(Qualem se illic
semel prodidit, talis perpetuo maneat oportet) 창조와 일상의 일들, 고난
을 통한 역사과 같은 그의 은밀한 역사가 결코 기적이 덜 되는 것이 아님’
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