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을 기리는 세 가지 소망_강경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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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을 기리는 세 가지 소망

 

< 강경민 목사, 일산은혜교회, 총회 부회록서기 >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빠지는 역사적 과오 밟지 말아야”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을 때 칼빈은 겨우 8살이었다. 칼빈이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던 1530년대는 루터가 주도했던 종교개혁이 쇠락의 조짐을 보였다고 한다.

 

동시대에 일어난 농민운동에 대한 루터의 편협한 태도,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이 가져온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세력의 틈새, 루터와 쯔빙글리의 극렬한 성만찬논쟁 등이 종교개혁운동의 불꽃을 쇠락시켰다는 것이다. 그때 칼빈이 일어나 다시 종교개혁의 불꽃을 되살려 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보편적 이해이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루터 없이 칼빈이 없고, 칼빈 없이 종교개혁의 성공은 없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 교단에서만은 루터와 칼빈이 너무 다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루터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 절하되어 있고 칼빈에 대한 이해도 너무나 교리적인 측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교단의 존립 근거는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다. 우리가 말하는 바른 신학이 박윤선 신학을 말함이 아니요, 나아가서 칼빈 신학을 말함도 아니요,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신학적 탐구를 계속하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와 같은 일이 우리 시대에 시작된 일은 아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이미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고 그 역사의 흐름 속에 칼빈이 있고, 아브라함 카이퍼가 있으며, 박윤선이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의 신학적 탐구가 칼빈의 틀, 박윤선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 분들 자신이 원치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합신은 개혁주의 신학의 반열에 있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키는 역사적 과오를 뛰어 넘어야 할 과제도 함께 수행해야만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불과 4년 앞 둔 시점이다. 합신 교수들을 비롯한 합신 내의 뛰어난 신학적 소양을 가진 목회자들이 연대하여 박윤선을 뛰어 넘는, 칼빈을 뛰어 넘는 바른 신학의 지평을 끝없이 넓혀가길 소망한다.

 

예컨대 정암신학강좌는 정암을 되돌아보는 기념강좌가 아니라 미래의 신학을 주도할 하나님 나라 신학을 개척하는 세계적인 신학강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급적 빨리 이런 기초 작업이 기획되길 기대한다.

 

존 웨슬리는 비록 칼빈의 ‘예정론’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신학이 칼빈주의 신학과 ‘머리카락 하나’ 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온 세상이 나의 교구’라는 그 유명한 웨슬리의 명언은 사실상 칼빈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칼빈 역시 자신을 분리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터나 칼빈은 자신들이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하나의 교회에 신실한 구성원으로 남기를 진정으로 바랐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카톨릭교회를 대체하길 원하지 않았고 회복하길 소원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교회사가들의 일관된 증언이다.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120여 년 전 하나의 뿌리였던 장로교회가 오늘날 무려 200여 개가 넘는 교단으로 분열되다니 이 어인 변고인가? 물론 신학적 정체성과 도덕적 진실성을 외면한 조직적 연합이 성경적 교회의 하나됨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양심과 상식이 통한 신학적 사유에 근거하여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진실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2011년에 시작된 고신과의 통합논의는 하나님의 뜻이요, 역사적 과업임엔 틀림없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상기하고 진지한 협상을 계속해 간다면 2017년까지는 두 교단의 통합이라는 교회사적 쾌거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역설적 진리이지만 오늘날은 치열한 개혁적 사유만이 통합을 가능케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전통에 굳게 서 있는 합신 교단은 민족공동체가 앓고 있는 분단의 벽과 양극화의 아픔을 초극하고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역사가인 월이엄 바우스마(William Bouwsma)는 “칼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혁명가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을 바꾸는 일에 칼빈의 신학처럼 역동적 역할을 한 사상은 없었다는 것은 수많은 교회사가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필자는 솔직히 이런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다. 합신 신학이 개혁주의인가, 경건주의인가? 한국교회가 합신을 개혁주의신학의 요람이라고 인정해 주고 있는가?

 

칼빈의 5대교리만 외칠 것이 아니라 칼빈 신학이 끼친 세계변혁의 역동성을 회복하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