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십자군 전쟁과 그 의미 _ 박상봉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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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강

 

십자군 전쟁과 그 의미

 

<박상봉 교수 _ 합신 역사신학>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의 서유럽으로의 팽창 저지,
민족주의와 시민계급 성장, 유럽의 세계관의 지평 확대,
선교적 관심 등에 일조했다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을 버리고
참혹한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 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대한 경계를 기억해야 한다

성전(聖戰)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은 최고의 악이며
이교도들을 무력으로 결코 돌이키게 할 수는 없다

 

십자군 원정은 신앙의 이름으로 1095년부터 1291년까지 대략 200년 동안 지속된 참혹한 종교 전쟁이다. 처음에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셀주크 터키(11-14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을 다스린 수니파 무슬림 왕조)의 지배로부터 탈환하는 목표를 가진 거룩한 대의명분 속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은 유럽 사회에 몇몇 긍정적인 변화를 준 것도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공허한 환상과 인간의 탐욕으로 끝났다.

 

십자군 원정의 배경

예루살렘은 638년에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의 뒤를 이은 ‘카리프’(후계자)들의 정복전쟁을 통해서 점령되었다. 그럼에도 이 아랍의 정복자들은 기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처음에 유대교와 기독교를 이단으로 보지 않았고, 다만 마호메트의 예언을 따르지 않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정복한 땅에서 자유롭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묘(聖廟)교회를 방문하는 기독교인들도 막지 않았다. 하지만 1078년에 이슬람교를 믿었지만 아랍인이 아니었던 셀주크 터키가 예루살렘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이 터키인들은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땅에 교회들과 수도원들이 융성한 것을 보고 놀랐으며, 이전 아랍인들과 다르게 기독교에 대한 어떤 존중도 드러내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이 성지를 방문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헤레나가 80세 나이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이래로 기독교인들은 성지순례를 매우 중요한 신앙의 요소로 간주했었다. 이 때문에 이교도에 의해서 성지순례를 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위협이 되었으며, 신앙적인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다른 몇 가지 이유들과 함께 이러한 급변적인 상황은 기독교 성지 탈환에 대한 대의명분을 갖게 했고 당시 중세인들의 신앙적인 열심 속에서 십자군 원정을 긍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최초의 기독교인이었던 콘스탄티누스가 건설한 위대한 도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무슬림들의 군사적인 위협이 십자군 원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현실화시킨 원인이었다. 이미 1071년에 셀주크 터키는 비잔틴 군대를 대파하고 소아시아 깊숙이 진격하여 비잔틴 제국의 반 이상을 점령한 상태였다. 매우 위급해진 비잔틴 황제 미카엘 7세는 1073년에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의 수위권 문제로 로마 교황이 1054년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교서를 내린 것 때문에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심각한 갈등 속에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당시 미카엘 7세의 요청이 얼마나 절박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셀주크 터키를 물리치면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확고히 할 수 있다는 기대 속에서 1074년에 5만 명의 군대를 콘스탄티노플에 보내기 위해 계획했지만, 그러나 여러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최종적으로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092년에 셀주크 터키는 소아시아의 니케야 지역까지 점령하고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에 있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기 위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비잔티 제국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무슬림들을 막는데 한계를 느꼈다.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는 다시 사절단을 보내어 교황 우르반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전통적으로 기독교 영토였던 비잔틴 제국에서 이슬람 무법자들을 축출하는 것이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신자들에게 당연한 의무라는 친서를 보낸 것이다. 이 친서를 받고 우르반 2세는 비잔틴 제국에서 셀주크 터키를 축출하고, 기독교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다.

 

십자군 원정

우르반 2세는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서 1095년 11월 18일에 프랑스 남부 클레르몽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11월 27일에 셀주크 터키와 전쟁을 선포하면서 소아시아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도와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 성지를 다시 빼앗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들이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급박한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국경으로부터 또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무서운 이야기가 전해져 왔습니다. …… 이 악당들에게 복수를 하고 성지를 탈환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거룩한 묘지가 있는 땅으로 가서 그곳을 이교들로부터 빼앗아야 합니다.” 이 대의명분이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금 가려는 땅은 환희의 낙원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는 환상도 당시 극심한 빈곤에 처해있는 유럽 사람들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면죄(免罪)의 특권을 주겠다”고 한 약속은 유럽 사람들의 충성심을 강력하게 이끌어 냈다. 로마 교황청의 선전은 더 많은 사람들을 십자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교묘하고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각 지역 교회들 안에서 사제들은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십자군 원정에 합류할 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독려했다. 무슬림들의 가증스러운 소행들을 자세히 기록한 여러 가지 문서들을 작성하여 분노심을 자극시켰다. 십자군 원정을 위해서 황제와 교황 사이에 서임권 논쟁으로 촉발된 대립도 잠시 멈추었다. 유럽 전체가 하나의 거룩한 대의명분 앞에 완전히 연합된 것처럼 보였다. 결과적으로, 유럽 전역에서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셀 수 없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 십자군 원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긴 고난의 행렬에 동참했다.

몇 차례의 작은 규모의 원정을 제외하고, 대규모 십자군 원정은 200년 동안 크게 일곱 번 정도 시도되었다.

1차 십자군 원정

1095년에 시작된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숫자는 - 최근 십자군 원정의 문서들에 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파악된 것은 - 대략 15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십자군에는 훈련된 군인들만 참여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가장 먼저는 은둔자 피에르를 따라서 아무런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도 참여했다. 그들은 1096년 여름에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러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인 열광 속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넜지만 터키인들의 매복에 걸려 완전히 점멸되었다. 이 원정대 외에 다양한 무리들이 참여했지만 길을 가는 도중에 사망하거나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헝가리와 몇몇 지역에서는 그곳 군사들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군사 훈련을 받은 4만 명 정도의 정규 원정군들은 1097년 초에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했다. 그들은 1097년 6월에 소아시아의 니케야를 점령하고, 1098년 6월에는 안디옥을 탈환했다. 계속 남쪽으로 진군하여 1099년 6월 초에 예루살렘 성벽 앞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거의 5주 동안 전쟁을 치른 끝에 1099년 7월 15일에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하지만 이 전쟁의 모습은 너무도 끔찍했다.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간 십자군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조금 과장된 기록일 수 있지만, 예루살렘 성전(터) 주변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피가 사람들의 무릎까지 차올랐다고 한다: “이교도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학살한 예는 듣고 보도 못한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이 살육의 장면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한 일이 얼마나 끔찍한 짓이었으며, 십자군들의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알려주었다. 표면적을 볼 때, 제1차 십자군 원정은 예루살렘 탈환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그들의 잔혹한 만행으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의 명예는 땅바닥에 추락했다.

2차 십자군 원정

1144년 소아시아의 에데사가 다시 셀주크 터키에게 점령되었다. 이 때문에 2차 십자군 원정이 1147년에 이루어졌다.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드 3세가 참가했다. 두 사람은 당시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베르나르에 의해서 설득된 것이다. 하지만 2차 십자군 원정은 성공하지 못했다. 20만 명의 대군이 출정했지만 터키인들에게 계속 참패를 당한 끝에 아무런 성과 없이 1148년에 모두 철수했다. 주목할 것이 있다면, 2차 십자군 원정 때 로마 교황청이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십자군에 가담한 사람들 고인이 된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면죄부를 샀으나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는 돈만 지불하면 십자군에 참가할 의무도 면제 받게 되었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사람이 원치 않으면 면죄부를 사서 대리인을 보낼 수도 있었다. 이 현상은 유럽 사람들의 십자군 원정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3차 십자군 원정

1187년에 사라센 왕국의 살라딘에게 예루살렘도 빼앗겼다. 그들은 90년 전에 십자군들이 입성했을 때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잔혹하고 야만적인 학살 행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의 돈을 바치는 조건으로 예루살렘 시민들은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89년에 예루살렘의 재탈환을 위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그리고 사자 왕으로 알려진 영국 왕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3차 십자군 원정이 패배를 한 이유는 사라센 군인들의 용맹함이나 살라딘의 탁월한 역량이 아니었다. 십자군들의 분열과 의지결여에 있었다. 이 원정을 끝으로 수십만 명의 거대한 병력이 십자군에 참여하는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4차 십자군 원정

3차 십자군 원정 이후에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대의명분은 거의 상실했다. 중세 시대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해서 1200년에 4차 십자군 원정이 계획되었다. 이 십자군 원정의 목적은 이집트에 있는 살라딘의 본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우 교활했던 베네치아의 총독 때문에 그 목적은 성취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베네치아에 도착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 삯을 지불할 돈이 없어서 원정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탐욕스러운 십자군들은 1204년 4월 12일에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하며 비잔틴 수도를 함락했다: “그 사악한 인간들이 저지른 만행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연약한 부인들, 젊은 여인들, 하나님께 헌신한 처녀들을 가리지 않고 길거리에서 능욕했다. 칼에 찔리고, 강간당하고, 밧줄에 묶인 무고한 시민들의 비명이 골목, 큰 길 그리고 교회 안에서 터져 나왔다.” 결국, 이 때문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관계는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단절되었다.

4차 십자군 원정 이후에 1212년에는 온 유럽을 큰 슬픔에 빠지게 했던 어린이 십자군이 출현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5만 명 정도 되는 어린이들이 배를 타고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했지만, 결국 좌절되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길을 가는 도중에 사망했고, 특히 프랑스의 어린이들은 사악한 어른들에게 속아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십자군 원정이 얼마나 왜곡된 것이었는가를 알려준 대표적인 사건 중에 하나이다.

5차 십자군 원정

5차 십자군 원정은 1228년에 이루어졌다.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무력으로 싸우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1229년에 외교를 통해서 10년 동안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 등과 그곳들로 연결된 순례 길을 안전하게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물론, 프리드리히 2세가 얻은 승리에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지배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이 무장을 하지 않은 채 무슬림들과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 협상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피를 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입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비범한 일이었다. 1239년 프리드리히 2세가 협상한 만기가 돌아왔으나 예루살렘의 평화는 불안한 정세 속에서도 좀 더 유지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1244년에 기독교인들이 혹독한 대가를 치른 후에 다시 무슬림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6차와 7차 십자군 원정

프랑스의 경건한 왕 루이 9세가 이끌었던 두 차례 십자군 원정(6차 1248년, 7차 1270년)은 순수한 신앙심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십자군 원정도 아무런 성과 없이 무고한 생명들만 고통 속에서 사라지게 했다. 루이 9세는 1270년 7차 십자군 원정 때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291년에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기독교 통치지역이였던 아크레가 무슬림들에게 점령되었다. 결국, 중세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성지를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십자군 원정의 거대한 서막을 내려야 했다. 이때로부터 예루살렘은 1차 세계대전 때 예루살렘 전투(1917년)를 통해서 터키인들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었다.

 

정리하며

물론, 십자군 원정은 부정적인 결과만 가져오지 않았다. 대표적인 실례로, 이슬람교가 서유럽으로 팽창되지 않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1453년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에 무너졌다. 만약 더 일찍이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서유럽은 훨씬 더 큰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초기 10년 안에 동방교회가 차지했던 대부분의 지역은 러시아만 제외하고 이슬람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521년 오스만 터키의 슐레이만 2세(Suleiman)에 의해 동유럽의 관문인 베오그라드(Belgrade)가 점령되었다. 1526년 8월 20일에 도나우(Donau) 강 근교에 위치한 모하치(Mohcs)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헝가리가 패배했다. 그리고 1529년에 신성로마제국은 오스트리아 빈(Wien)까지 침공한 오스만 터키를 저지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사실, 교황주의자들의 극렬한 훼방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이 유럽에서 안정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오스만 터키의 동유럽 침략이 기여한 면도 없지 않다. 당시 국제정세적인 면에서 볼 때, 무슬림들이 유럽의 턱 밑에서 대치하고 상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칼 5세)로 하여금 이 낯선 이교도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유럽 내에 내전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치적인 안정과 개신교 세력의 군사적인 지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십자군 원정은 봉건제도가 약화되고, 그 대신에 민족주의와 시민계급이 성장되는데 크게 일조했다. 동방의 학문과 문화를 유럽에 소개하면서 유럽 사람들의 지성과 세계관에 대한 지평도 넓혔다. 이교도들을 향해서 선교적인 관심을 갖게 하는 동인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명을 사지(死地)로 이끌었던 십자군 원정은 유럽 사회에 쉽게 씻을 수 없는 아픔, 환멸 그리고 혼란을 남겼다. 도덕적인 해이(解弛)가 유럽 사회에 만연되었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에 두꺼운 철문이 닫히도록 했다. 신앙을 가진 십자군들의 잔혹함으로 인하여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의 기독교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오랜 역사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울 수 없는 비극과 상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의 분열,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증오심 그리고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사이의 투쟁에 대한 질긴 뿌리가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심각한 타락을 가져온 원인 중에 하나인 면죄부 교리가 정착되었다. 결과적으로, 십자군 원정은 중세 후기의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교황의 독제와 극심한 타락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큰 단초를 제공했다.

십자군 원정과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을 버리고 참혹한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대한 경계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생한 종교 전쟁은 한 번도 교회와 인간을 유익하게 한 적이 없었다. 전쟁은 최후의 수단으로 간혹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것을 아픔과 절망으로 빠뜨리는 악으로 전락한다. 더욱이, 성전(聖戰)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은 최고의 악이기도 하다. 이교도들을 무력으로 결코 돌이키게 할 수 없다. 더딜지라도 인간의 마음과 양심을 복음으로 설득하는 것,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피는 피를 낳으며 그리고 칼의 잔혹함은 칼의 잔혹함을 낳을 뿐이다. 우리의 싸움은 원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자신의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기독교인들이 피를 흘려 희생될지라도 결코 잔혹함으로 이교도들의 피를 흘리지 않게 하는 헌신을 요구하는데, 이 목적은 영토 정복에 있지 않고 인류의 구속에 있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 사실에 대한 망각이다. 당시 교회의 어리석음과 탐욕이 거룩한 옷을 걸치고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간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