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선언적 지식과 절차적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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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선언적 지식과 절차적 지식

 

“무엇이 어떠하다(knowing what)”라고 명제적 형태로 표현되는 선언적 지식(declarative knowledge)은 명료하다. “바닷물은 짜다”, “지구는 둥글다”와 같이 이해와 암기를 통해 단시간에 축적된다. 이에 반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knowing how)”로 방법과 과정에 관한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은 모호하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 농구공을 던지는 방법처럼 반복과 시행착오를 통해 장기간에 축적된다.

자전거 타는 방법은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발로 페달을 밟고, 손으로 핸들을 균형 있게 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하고 암기한다 하여 자전거를 탈 줄 아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자전거를 타 보면서 균형감이 무엇인지 익혀야 한다. 여러 번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배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여러 번 넘어지며 이것을 익히는 데 몇 시간, 며칠이 걸리지만, 한 번 익히고 나면 온몸이 기억하여, 20년이 흐른 후에도 자전거를 탈 수 있다.

목사나 신자는 선언적 지식을 많이 알기 쉽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라는 말을 모르는 목사나 신자가 있을까? 하지만 이 명제의 깊이와 무게를 이해하는 데는 몇 십 년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사랑해 보면서 많이 넘어지고 피를 흘리고 속을 태워 봐야만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실제의 삶에서 숱한 시행착오를 통하여 온몸으로 익힐 때에야 비로소 아는 것이다. 절차적 지식이 없는 명제적 지식은 말쟁이와 표리부동과 가벼움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명제적 지식을 가장 많이 아는 이는 고3이고, 신학에 관한 명제적 지식을 가장 많이 아는 이는 신학교의 3학년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누가 회사 경영과 교회 목회를 고3과 신학교 3학년에게 맡기겠는가?

목사나 신자는 옳은 말만 골라서 하는, 세상 말로 ‘재수 없는 자’가 되기 쉽다.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며 성경 말씀을 실제로 구현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없는 한 위선자로 비치기 쉽다. 왜 한국 교회는 사회의 걱정을 받고, 뉴스를 통해 세습과 재정의 불투명과 성에 관한 비판을 받을까? 왜 사랑과 연합을 성경에 근거하여 그렇게 많이 말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그 어떤 나라의 교회보다도 더 많은 분열과 교단 숫자를 자랑할까?

우리 합신 교단도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혹 절차적 지식보다 명제적 지식으로 이해하고 암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우리가 정말 바르고 거룩한 면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 바르다고 취해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히 살펴야 한다. 우리 교단에도 왜 은퇴에 즈음하여 부부(夫婦) 세습과 무리한 임기 연장과 불법의 교회당 처분 등의 소식이 들리고, 여러 노회에서 분열과 고소가 이루어지는지 살펴야 한다. 각 지교회의 직분자들도 장로와 집사와 권사로서 겸손한 실천과 성찰 이전에 아는 것을 드러내기에 바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우리 모두 그간 자신이 말한 명제적 지식에 대하여 책임을 지기 위하여 더 큰 성찰과 절제와 양보가 있어야 한다.

합신 교단은 “바른”이란 단어를 많이 쓰고 있다. 작년 총회에서는 총회 선언문 발표와 종교인과세법령 헌법소원 결정을 통해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명제적으로 사회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발표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우리를 다른 교단들만이 아니라 이제 국가와 사회도 지켜보고 있다. 이럴수록 우리는 경건과 바름의 실천에 더욱 힘써야 한다. 바름에 관한 명제적 선언을 하면 할수록 그에 따른 실천적 책임과 비판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약 3:1절은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목사와 교수와 직분자일수록 더욱 명심해야 한다. 많이 아는 자가 아니라, 그 아는 것을 실천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선언적 지식의 수평적 축적과 확장보다 절차적 지식의 깊은 묵상과 치열한 실천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교단과 신학교가 행사와 프로젝트와 선언을 많이 할수록 더욱 무거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더 큰 심판에 직면하는 것임을 새겨야 한다. 이것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과 부끄러움을 주실 것이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선포하기 전에 온몸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치열하게 실천하려고 했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