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개혁주의(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억하는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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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개혁주의(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억하는 2019년

 

마틴 루터는 1517년에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이를 기념하여 2017년에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교회가 기념하였다. 물론 2017년의 종교개혁 기념이 단지 루터주의만 다루지 않고 개혁주의까지 포함하였지만,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루터주의의 종교개혁이지, 개혁주의의 종교개혁은 아니다. 개혁주의의 종교개혁은 1519년에 강해설교를 시작한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년)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519년 1월 1일에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교회”에서 마태복음 첫 설교를 하였다. 교회력을 따라 주어진 본문으로 설교(lectio selecta)를 했던 로마 가톨릭 사제들과 달리 그는 성경의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해하는 설교(lectio continua)를 하였다. 로마 가톨릭은 지금도 전 세계 모든 미사에서 선포되는 성경 구절이 같다. 츠빙글리는 헬라어 성경에 근거하여 말씀으로 말씀을 해석하여 설교하였고, 이 설교는 자연스럽게 당시 사제들의 타락과 안일함, 사순절 금식, 그리고 마리아 숭배 등의 잘못된 신앙 형태를 비판하게 되었고, 무엇이 올바른 성경의 가르침인지 크게 드러내었다. 이러한 설교는 취리히를 비롯한 스위스의 여러 지역들에 큰 영향을 미치며 종교개혁으로 이어졌고, 이후 제네바의 칼빈을 통해 완성도는 더욱 높아져갔다.

헤르만 바빙크가 그의 『개혁교의학 1권』에서 지적한 것처럼 개혁주의 교의학은 츠빙글리로부터 시작한다. “근본적 사상들, 즉 신학적 출발점, 인간의 전적 의존,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 교회와 성례에 대한 영적 이해, 종교개혁에 대한 윤리적, 정치적 의미가 이미 그에게 존재했다.”(박태현 역, 249쪽). 루터주의 개신교와 개혁주의 개신교는 츠빙글리 때부터 차이가 커졌고, 다른 점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 차이에 대하여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그 차이가 아마도 가장 잘 표현된 것으로서 개혁파는 ‘신론적으로’, 루터파는 ‘인간론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개혁파는 역사적 정황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까지 오른다는 것이다. 그런 반면 루터파는 구원 역사의 중심에 자신의 입장을 취하고 하나님의 작정을 깊이 캐내려는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 전자가 제기한 일차적이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는가인 반면, 후자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가다. 전자의 투쟁은 무엇보다도 이교 사상, 우상숭배인 반면, 후자는 유대 사상, 행위 구원에 대항했다. 개혁파는 회고하기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작정으로 돌리고 사물들의 ‘왜냐하면’의 원인을 뒤따라 추적하고, 또한 전망하기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소용되게 하기까지는 쉬지 않았다. 루터파는 ‘~라는 것’ 사실에 만족하고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즐겼다. 이러한 원리적 차이로부터 하나님의 형상, 원죄, 그리스도의 인격, 구원의 서정, 성례들, 교회 정치, 윤리 등에 관한 교리적 논쟁들은 손쉽게 해설된다.”(위의 책 248쪽).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루터주의와 개혁주의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많은 독자들이 자신들이 루터주의에 가까움에 놀랄지 모르겠다. 츠빙글리는 “나는 루터적이 아니라 복음적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개혁주의는 루터주의를 넘어서서 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드러내려고 했고, 모든 현상의 원인을 근본까지 추적하였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계시의존사색에 따라 대부분에 대한 성경적 답을 가짐으로 철학적·정서적 안정까지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론적인 접근을 넘어서서 신론적 접근으로 더욱 개혁된(reformed) 개혁주의(The Reformed)를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으로 퉁칠 수는 없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단들은 2019년에 루터주의와 개혁주의에 어떠한 차이가 있고, 개혁주의가 성경과 하나님을 얼마나 찬란하게 드러내었는가를 확인하고 크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물론 단지 그 차이를 확인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우리의 삶에 대한 적용과 무엇보다 자기를 부인하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단지 그 차이를 드러내고 아는 것은 지적인 교만과 비판주의와 분리주의에 머물 수 있다. 바빙크가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소용되게 하기까지 쉬지 않는 자는 단지 지적인 규명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부인함으로 실천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안타까운 이 시대를 개혁주의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실천과 적용에까지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