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집설교| 착한 행실과 하나님의 영광 _ 도지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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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특집설교

착한 행실과 하나님의 영광 (마 5:14-16)

 

<도지원 목사 _ 예수비전교회>

 

우리는 나 혼자의 거룩한 삶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내 옆의 다른 형제가 사는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천국의 통치에 복종한 자로서의 삶,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복음에 어울리는 삶을 나타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산 위에 있는 동네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 은유를 말씀하셨다. 첫 번째 은유는 “산 위에 있는 동네”이다. 이때 “산 위에 있는 동네”는 물론 제자들인데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신 이유는 그들이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눈에 띄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을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을 주목하고 관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행실이 중요하다. 왜냐면 세상이 주목하고 관찰하는 것은 결국 제자들의 행실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제자들의 외모, 재능, 학식이나 그 말보다는 제자들의 삶, 즉 행실을 주목하고 관찰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행실은 세상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그들은 우리의 행실을 통해 우리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실은 세상이 우리를 들여다보는 창이다. 세상은 우리의 행실을 보고 우리를 비방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옛날 느헤미야는 가난한 동족에게 높은 이자를 취한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소행]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느 5:9).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후 8:20-21).

또한 바울은 감독의 자격을 말할 때 이렇게 말했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7). 또한 그는 디도에게 젊은 남자들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했다.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또한 그는 디도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이처럼 제자들은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숨기우지 못할 존재이다. 그러기에 세상이 주목하고 관찰하는 그들의 행실은 중요하다.

 

등불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째 “등불”의 은유를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15절). 여기서 강조된 것은 등불을 켜는 목적이다. 그 목적은 등불의 빛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등불은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게 된다.

그러면 이 은유는 무엇을 말하기 위한 것일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등불”의 은유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막 4:21-22, 눅 8:16-17).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등불의 은유는 계시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눅 11:33-36). 이것은 예수님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을 언급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등불의 은유는 계시에 대한 반응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등불의 은유는 무엇을 말하기 위한 것일까? 그것은 이 은유에 이어지는 16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 “이같이”라는 말은 ‘앞에 나온 등불의 은유에서와 같은 방식으로’라는 의미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둠”으로써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하는 것처럼, 제자들은 세상의 빛으로서 “착한 행실”을 통해 그들의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해야 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등불의 은유는 제자들의 행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우선,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보여주는 공적인 차원이다. 예수님은 “너희 빛 …너희 착한 행실…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적인 차원에서 제자들의 행실을 말씀하신 게 아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세상의 빛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려면 개인의 거룩한 삶만으로는 부족하다. 교회는 공적인 차원에서 거룩한 삶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나 혼자 거룩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내 옆의 다른 형제가 사는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다른 형제의 악한 행실을 보면 충고하고 착한 행실을 보면 격려해야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착한 행실)을 격려하며”(히 10:24). 우리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악한 행실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공적인 차원에서 “세상의 빛”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착한 행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빛”으로서 교회의 사명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이 그 사명을 수행해야 할지 말씀하셨다. 그것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빛을 가지고만 있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빛을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취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 속에 함축된 의미이다.

그러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는 말씀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착한 행실을 통해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우리가 세상에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은 착한 행실이다. 물론 말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다. 교회는 착한 행실을 통해 천국 복음을 전파할 때 세상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는 말이 있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우리가 말로써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그래서 복음을 광고하고, 전도지를 나눠 주고, 전도집회를 연다고 해도-우리의 착한 행실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면 그 모든 노력은 별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은 세상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볼 때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천국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세상에 영향을 미친 방식은 그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였다. 누가는 이 사실을 두 번이나 기록해 놓았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

여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는 말은 그들이 믿는 사람들의 착한 행실을 보았음을 나타낸다. 그 결과 구원 받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행 5:12하-14). 초기 기독교는 믿는 사람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믿는 아내가 어떻게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게 되는지 이렇게 말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 3:1-2). 믿지 않는 남편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믿는 아내의 말이 아니라 착한 행실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4-16). 여기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라는 말은 빌립보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바울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것이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라는 말이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가 감당해야 할 복음 전도의 사명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빌립보 교회는 그들의 구별된 삶(착한 행실)을 통해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이것이다. 우리는 복음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전도대를 조직하고,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행실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한 편으로 전도를 위해 애를 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행실 때문에 사회의 지탄을 받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복음은 사회적 영향력을 잃고 있다. 이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분명하다. 그것은 “산 위에 있는 동네”로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행실을 바로잡는 일이다. 우리는 회개하고 천국의 통치에 복종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복음에 어울리는 삶을 나타내야 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상).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는 말씀의 실제적 의미를 설명하실 때,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라는 말 다음에 이런 내용을 추가하셨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것은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착한 행실의 동기를 나타낸다. 그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대개 사람들은 그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 자신들의 영광을 구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 자신들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착한 행실”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착한 행실과 그 동기가 다르다.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동기가 되는 착한 행실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1-33).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착한 행실”의 동기가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착한 행실”이 제자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란 말을 처음 사용하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그 뒤로 산상수훈에서 일곱 번 더 나타난다(마 5:44, 48; 6:1, 14, 26, 32; 7:11). 이와 함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 또는 “너희 아버지”(마 6:8, 15) 또는 “네 아버지”(마 6:4, 6, 18)란 말도 나타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을 전제로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란 말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에게 중생이 일어났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착한 행실이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되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의 착한 행실 뒤에는 그들을 중생케 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제자들은 하나님에 의한 중생의 결과로서 착한 행실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요한일서는 중생의 결과가 삶에서 나타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2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3;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4:7).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5:1).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5:18).

이처럼 제자들의 착한 행실은 그들을 중생케 하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도 베드로도 이와 유사한 말을 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착한 행실)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단, 차이가 있다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을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말한 것이다.

우리의 착한 행실은 그 동기가 무엇인가? 자신의 영광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