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섭리의 은혜 _ 현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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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섭리의 은혜

 

<현창학 교수 _ 합신,구약학, 본보 논설위원>

 

하나님은 영원한 목적과 계획 속에 성도의 삶을
그에게 영광이 되는 방향으로
성도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 16, 17장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이른바 섭리의 은혜를 다룬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가장 안전한 구원을 받고 가장 큰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우주를 운영하시는 원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 능력으로 우주와 역사의 모든 사건을 통제하고 지배하시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큰 유익을 주는 것이니,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아무것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가장 큰 안심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 24장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종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내 아들 이삭의 신부를 구해오는 내용인데, 성공의 기약이 전혀 없는 어려운 임무이건만 24장의 내러티브는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 일체의 언급을 삼가고 있다. 그냥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이어지면서 리브가를 만나게 되고 기적적으로 처녀가 청혼에 응하여 가나안까지 기꺼이 동행함으로 이삭과의 결혼이 성사된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고백들의 도움을 받아 사건 전모를 살핀 성경 독자는 이 일이 엄연히 하나님의 조밀한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 일임을 알게 되지만, 그러나 내러티브는 굳이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 함구함으로 우리 삶에서 겪게 되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경험을 문학적으로 재현해주고 있다.

3차원 공간에 사는 우리는 통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지하지 못하며 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 언약의 하나님은 어느 한 순간도 방기(放棄)하심이 없이 성도의 삶에 간섭하시어 그를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안 보일 때 계신 분이시고, 안 계신 것 같을 때 계신 분이시라고 진술하면 우리 삶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이 되겠다. 우선 하나님은 안 보일 때 계신 분이시다. 우리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 계셔서 우리를 세밀하게 보호하시고 조밀하게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종을 그가 반드시 다다라야 할 지점에 정확히 인도하셨다(창 24:27, 48). 인간의 눈에는 갈 바를 전혀 알 수 없는 절망스럽기까지 한 길이었지만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지점, 완벽한 지점까지 인도하셨다. 우리는 대부분 뜻 없이 지나가는 듯한 일들과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어나는 것 같은 유감스러운 일들에 휩싸여 산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삶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 속에 성도의 삶을 그분에게 영광이 되는 방향으로 성도 자신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또한 안 계신 것 같을 때 계신 분이시다. 이 점 역시 매우 중요하다. 너무 어려워서 이제는 하나님도 안 계신 것 같다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인간에게는 일어난다. 그야말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진”(고후 1:8) 것 같은 곤경, 그래서 이제는 끝이다 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가장 안전한 길 위에 있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적) 사랑이 그의 삶을 큰 우산처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사충성”(至死忠誠)이란 휘호를 사랑한다. 여기 ‘충성’이란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죽기까지 내어주신 신실한 사랑을 말한다. 이 사랑이 우리 안에 구별성(distinctiveness)을 빚어내었고 이 빚어진 구별성을 우리가 살아 내는(live out) 원리가 ‘죽도록 충성하라’라는 계명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길이 없다, 이제는 끝이다, 하나님도 안 계신 것 같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이 와도 하나님의 백성은 안심한다. 안심할 수 없어도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 성도의 삶의 강력한 역설이다. 깊은 좌절을 겪으며 그 과정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며 믿음이 자라며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 독생자를 보내신 신실한 사랑이 동력이 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전 삶을 감싸 보호하고 있어 우리가 참으로 안전하게 여기까지 온 것이다.

“섭리가 아니고는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Nothing without providence!)는 미국 콜로라도 주의 모토가 생각난다. 올 한 해도 여러 힘겨운 일이 많았지만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도된 것임이 분명하다. 내년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우리는 그분의 크신 목적과 계획 가운데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복된 지점으로 인도를 받을 것이다. 혼잡과 피로를 주는 일만 가득한 것 같은 일상이지만 섭리의 은혜를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며 그분을 만나는 가운데 우리는 조금씩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