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집 설교| 십자가 신학과 목회 소명 _ 김병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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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특집 설교

이 글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경건회(2018. 10. 23.)의 설교를 기독교개혁신보의 요청에 따라 약간의 수정을 거쳐 글로 적은 것임을 밝힌다. – 필자 주

 

십자가 신학과 목회 소명 (고후 4:1-6)

 

<김병훈 교수 _ 합신, 조직신학 | 나그네교회 목사>

 

한국교회의 문제의 답은 영광의 신학을 버리고,
십자가의 신학을 따르는 것이며,
영광의 목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목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합신은 지금 이 교회 상황에서 이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이 부르심은 우리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소명이 아니라
보편교회를 향한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1-6)

 

한국 교회가 위기에 있다고 한다. 무엇이 위기이고,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까? 지난 10월 셋째 주간에 합신은, 환난과 순교를 겪었던 프랑스 개혁교회 성도들인 위그노 교회를 돌아보는 ‘위그노 프로젝트’를 통해서, 위기 시대의 한국 교회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다. 또한 한국복음주의 신학회는 “위기시대의 바른목회”라는 주제로 다가오는 27일(토)에 2018년 가을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교인 수가 감소하고, 사회적 평판이 험해져 가는 이때에 이러한 문제인식과 반성,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은 매우 적절하고 필요하며 또한 귀중한 일이라 하겠다.

 

위기에 대한 문제 진단은 우선 두 가지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겠다. 하나는 교회 밖의 도전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 안의 문제이다. 교회 밖의 도전이란 몇 가지를 들면 하나는 과학의 이름으로 생명과 정신, 영혼이 물질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하는 진화론과 유물론적 사상이다. 다른 하나는 진화론과 유물론적 사고에 따른 사회윤리와 도덕적 기준의 변화이다. 사회는 점차 전통적 규범을 거부하고, 소수 인권보호라는 측면에서 동성애와 동성혼인의 인정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의 시대정신은 기독교의 가치 규범을 반사회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거부한다. 심지어 기독교를 표방하는 내부 세력 가운데서도 이를 지지하는 자들의 수가 늘어남으로 기독교적 가치의 규범은 심각한 훼손과 도전을 받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의 도덕적 부패로 인하여 교회를 비판하는 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측면이다. 교회는 사회로부터 개혁의 대상으로 취급을 당하고, 이제는 교회의 성장이 아니라 교회의 평판을 걱정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는 자조적인 탄식을 종종 듣는다. 하나를 더 말한다면 저출산과 노령화의 현상 위에 신자의 비율이 감소하면서 교인의 절대수가 감소하고 있는 현상이다.

 

교회 안의 문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것이다. 이것은 성장 제일주의를 추구하며 교회의 대형화를 자랑스러운 성공으로 여겨온 세속적 욕망이다. 복음 전도, 영혼 구원이라는 미명 아래 물량주의적 성공관으로 강단의 말씀마저 오염을 시켰다. 교인 수가 늘어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선한 것으로 여겨 왔으며, 소위 번영신학이 어느새 강단의 주인처럼 주위를 무서워하지 않고 큰 소리를 내게 되었다.

그런데 교인의 수가 증가함으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사실 축복이 아닌가? 당연히 그러하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라는 은혜를 주시는 때에, 목회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를 기회로 삼아 세속적 성공의 욕망에 눈이 먼 채 성경의 교훈을 바르게 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기까지 했다는 데에 있다. 양적, 물질적 성공은 교회사 속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여러 모양으로 목회자의 도덕적 타락의 양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교인들이 신앙교육을 바르게 배우지 못하고, 신자로 가져야 할 초보적인 복음 지식마저도 불안정하고, 은혜의 간증이란 것도 물질적, 세속적 축복을 말하는 것으로 거의 고착되었다. 개인의 간증 가운데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중심적 가치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일이 드물었다.

또한 진리나 가치나 문화에 있어서도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은 흐려졌다. 세상과 담을 쌓은 교회가 되어서는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를 앞세워, 교회의 세속화를 정당화하였다. 복음 전도를 위하여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방법론이라 할지라도, 방법론을 지배하는 정신이 세속주의이어서는 옳지 않다. 더 나아가 세속주의의 방법론이 교회의 정신을 지배하고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감사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죄를 거슬러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계명을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데에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을 위하여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며, 그것에 교회는 가치를 부여하고 소명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답을 가져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할까? 외부에서의 도전은 사실 극복이 가능하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면 되는 것이다. 영적 상황에 대처하는 모든 지혜가 성경에 있듯이, 역시 이 문제 인식의 답도 성경에서 구할 때, 뜻밖에 위기 시대라는 목회 환경은 성경에서는 매우 흔한 것이며 보통의 일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지상 사역 자체가 고난이었음은 우리가 다 아는 바이다.

영광스러운 오순절 성령강림의 때에 신약교회가 탄생하였으나, 그 후 사도시대는 고난이 목회 그 자체이었다. 초대로부터 후기 중세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목회는 고난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고, 위그노 교회는 그러한 양상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가 존경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청교도들은 실로 훌륭하였으나, 이들의 목회 환경도 결코 녹록지 않았다. 비국교도인 청교도들은 내어 쫓겨야 했고, 영국 국교회에 속힌 청교도들도 교회개혁을 위한 눈물의 기도를 흘렸다.

근세 이후에 이성이 진리의 척도가 되었으며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시대사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포스트모던주의라 하는 다원주의적 상대주의, 그리고 진화론과 유물론의 도전이 교회를 어렵게 한다. 진화론에 기초를 둔 진화주의는 과학의 이름으로 위세를 부리지만, 그것은 이론일 뿐이며,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 강하게 힘을 발휘하면, 항상 영혼과 정신은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에게서 소외되고, 황폐하게 된다. 몸만이 아니라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외부의 도전보다 교회 안에서의 시험에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외부의 도전보다 교회 안에서의 시험이 훨씬 더 교회를 위기에 처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교리상의 부패, 윤리적 타락, 복음의 훼손 등의 문제들이 칭찬을 받은 두 교회를 제외한 다섯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질책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예를 들어, 버가모 교회를 향한 말씀,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이나,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말씀,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계 2:20-21)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지닌 교회라 할지라도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는 여전하여 버가모 교회도 칭찬을 듣는 훌륭한 면모를 보인다. 예를 들어, 버가모 교회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2)가 그러하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사실 내부적인 문제이다. 복음이 진리라는 확신의 결여, 복음의 능력에 대한 불안, 세속적 욕망, 물량주의적 성공관, 도덕적 타락 등이 민낯으로 노출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면서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다. 위기의 초점이 대략 1970년 중반 이후로 한 30년간의 때에 누렸던 양적 부흥, 폭발적 성장을 그리워하며, 지금에 겪고 있는 상대적 왜소함과 또는 박탈감에 있다면, 그래서 다시 부흥의 시대로 가고자 하는 갈망에 있다면, 그러한 시각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정말로 위기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를 바라보는 초점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것을 향하여야 한다. 점차 사라져가는 눈에 보이는 교세의 영광과 교세의 능력, 그리고 목회의 물량적 성공을 안타까워하면서 위기를 말한다면, 불행하게도 위기를 극복할 방향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초점을 두고 있는 위기 인식은 세속적 물량주의의 영광을 추구한 것과 동일한 세속적 원리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실로 답이 아니다.

 

문제를 진단하는 시각이 올바르다면, 위기에 대한 답은 단순하다. 목회와 관련한 성경의 교훈을 다시 잘 배우고, 그 교훈에 따라 세워진 신학의 기초 위에서 목회를 진실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의 결과는 영광의 신학을 버리고, 십자가의 신학을 따르는 것이며, 영광의 목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목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루터에게 빚지고 있는 교훈인데, 지금 한국 교회 상황이 마치 어떤 이들의 말처럼 후기 중세와 같다면, 루터의 통찰은 더욱 절실하다.

영광의 신학은, 칼 트루만이 한 에세이에서 말한 바처럼, 세상이 존재하며 활동하는 방식과 하나님께서 일하는 방식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세상이 옳음을 드러내는 방식, 세상이 강자임을 드러내는 방식, 세상이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과 다를 것이 없다는 원리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세상과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신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 자체가 십자가 신학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불법한 자의 손에 넘겨지시어 죽임을 당하심으로 죄악을 이기고 죽음에 대하여 승리를 이루셨다. 겉보기에는 연약하지만 실제로는 강하고 옳으며, 아름다운 승리를 거둔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타락한 이후, 우리에게는 영광의 신학, 영광의 목회가 기본값으로 자리하고 있다. 누구라도 영광의 목회를 보고 성공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을 지경이다. 반면에 십자가의 신학, 십자가의 목회를 보면 갸우뚱한다. 어떻게 하길 래 이렇지? 십자가 목회가 이루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바라볼 안목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영광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위기시대의 한국교회에 대한 바른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실천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목회적 소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행하는 것으로 할 바를 다한 줄 아는 것, 그것 자체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는 것, 그것 자체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십자가 목회가 바른 답인 줄을 다짐해야 한다.

 

설교 본문은 바로 이러한 교훈을 바울 자신의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1년 6개월 여간 자비량으로 수고하여 세운 교회이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 에베소에서 목회를 3년가량 하는 기간에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이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고 비방하였다. 그리고 상당한 수의 교인들의 마음을 훔쳤고, 진리를 훼손하는 악영향을 주었다. 이들이 바울을 비방한 이유는 바울의 사도성과 관련한 것이다. 만일 바울이 진정한 사도라면,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그러한 환난과 시련을 어떻게 바울이 겪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였다. 바울이 그처럼 실패와 상처, 환란과 시련을 겪은 것을 보니, 바울은 사도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무엇인가? 영광의 신학이다.

그러나 바울은 달리 말한다. 고후 1:8-10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은 자신의 환란을 숨기기는커녕 도리어 더 알기를 바란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6절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바울 사도의 사도직의 진정성은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학에 있다.

 

십자가 신학, 십자가 목회를 어떻게 우리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기본값은 영광의 신학, 영광의 목회일진데, 어떻게 우리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4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 직분은 3장 4절 “새 언약의 일꾼”을 뜻한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세워졌으며 세워져가는 교회가 아니라, 은혜와 진리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세워진 교회, 또한 세워져 가는 교회의 일꾼이다. 우리가 바로 그 일꾼이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환란으로 인해 자신이 세운 교인들에게서 조차 사도직을 의심받아야 하는 시련을 개인의 특수한 상황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목회에 드러나는 원리로 교훈하고 있다.

바울은 이 직분을 받은 자들에게 권면하기를, “낙심하지 말라”고 한다. 낙심은 십자가 신학, 십자가 목회를 훼방하며, 목회적 의지를 주저앉게 한다. 낙심케 하는 이유를 경계하여야 한다. 목표가 영광에 있다면 주저앉을 따름이다. 이제 바울은 직분과 관련하여 올바른 이해를 교훈함으로 낙심에서 우리를 건져낸다. 본문의 말씀이 주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통해 오늘 위기시대라는 목회 상황에서 힘을 얻기를 바란다.

 

첫째, 직분의 부르심은,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1절)의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데에서 왔다. 부르심의 이유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므로 우리의 형편을 보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긍휼하심을 입어 받은 것은 실로 보배이기 때문이다.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보배를 담고 있는 그릇은 질그릇일 뿐이다. 보배로운 복음을 담고 있는 질그릇은 십자가의 길을 간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8-9절 말씀은 우리가 질그릇이며, 십자가 목회를 겪는 자임을 말한다. 여기에 10절은 복음이 바로 보배임을 말한다.

셋째로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4장 16-18절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무엇을 어떻게 감당할까? 첫째로 이것은 소명을 확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새 언약의 일군으로 주어진 소명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5절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는 의미는 전하는 정보만이 복음일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마음이 또한 복음 아래에 있음을 포괄한다.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오직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둘째로, 담대하여야 한다. 3-4절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외부에서 오는 도전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도전으로 인하여 기대했던 복음의 승리,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인해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세속주의에 타협하는 영광의 신학에 의한 기대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복음 사역에 훼방되는 일을 피하여야 한다. 2절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임의적인 목적을 위하여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진리를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내며, 도덕적 행실에 깨끗하여, 은혜에 합당한 겸손과 감사로 살아야 한다. 말로만 은혜를 말하지 않고, 목양의 태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겸손으로 감사를 표하며 교인들을 사랑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가 위기를 극복하는 일은 십자가 신학으로 자신의 소명을 확실하게 하는 데에 있다. 수적 부흥의 때에는 수의 증가에 가려졌던 허다한 목회적 실수와 오류 그리고 부패의 양상들이 이제는 드러나고 있다. 교인 수가 감소하는 이때에, 드러나는 목회상의 많은 허물들을 어찌해야 하겠는가? 어느 때에나 교회사 속에서 건강한 교회가 지켜 온 성경의 교훈, 곧 부르심을 받은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답일 것이다. 우리 합신은 지금 이 교회 상황에서 이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이 부르심은 우리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소명이 아니라 사실 보편교회를 향한 부르심이다. 따라서 낙심하지 말고 이 길을 먼저 간 믿음의 선진을 바라보며 걸어가야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