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드온의 300인 _ 남웅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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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기드온의 300인

<남웅기 목사 _ 바로선교회>

 

진정한 성도는 돈과 힘으로 나대지 않는다

주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게 소명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전쟁사 중에 ‘기드온의 300인’ 만큼 유명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사사기 7장엔 당시 이스라엘 사사로 부름 받은 기드온이 고작 300명 군사로 미디안 대군과 맞서 13만 5천 명을 대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전쟁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민족사적인 자랑거리요, 주일학교 학생들에겐 신바람 나는 성경이야기요, 성도들에겐 믿음의 실상을 간접 경험케 해 주는 기쁨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승리케 해주신 싸움이니까요.

그래서 언젠가 성도들에게 성경고사 문제를 내면서 O, X 문제로 다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기드온의 300인은 최정예병으로 뽑힌 자들이다.”

저는 정답을 X로 생각하고 출제를 했는데 성도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가 O라고 답했습니다. 그 한 사람에게 아니라고 답한 이유를 물었더니만, 당연한 문제를 낸 것을 보면 의외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랬답니다. 결국은 모든 성도들이 기드온의 300군사를 정예군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페르시아 크세르크세르 1세와 맞붙었던, 영화 ‘300인’과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스파르타의 300’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기드온의 300’은 닮은듯하지만 실제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영화는 용맹무쌍한 300인이었지만, 성경은 다만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스파르타의 용감무쌍하던 300인은 결국 전멸 당했지만, 오합지졸이던 기드온의 300인은 마침내 대승을 거두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영화가 인간의 용맹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성경의 메시지는 단호하고 분명합니다.

‘인간의 강하고 약한 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강한 게 없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300이 정예병이라니요?

우리가 글을 읽을 때 놓치면 안 될 결정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글쓴이의 의도입니다. 만일 그걸 놓치게 된다면, 우리는 작가가 의도하는 글 나라에서 미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더구나 그것이 하나님 이름으로 쓰인 성경이라면, 거기서 하나님의 의도를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놓쳐버린 셈입니다. 그게 곧 사탄의 손아귀에 잡힘을 말한다면, 이런 황당하고 참담한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음을 분간 못하면 음치요, 길을 못 찾으면 길치인 것처럼, 글의 의도를 놓치면 글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강자를 들어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늘 약자를 들어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출신이요, 그의 집안은 그 중에서도 약한 집안이었습니다(삿 6:15). 미디안이 침공했을 때 하나님은 기드온을 불러 세웠고, 아비에설 성읍 사람과 뒤이어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뒤이어 아셀과 스블론 납달리 등 비주류 지파 사람들이 전쟁에 동참했습니다. 그 숫자가 32,000명이었습니다. 1차로 걸러 내고 남은 자가 일만 명입니다. 그것도 많다고 걸러 낸 게 300명입니다. 그 300명은 하롯샘 물가에서 개가 핥듯이 마신 자들이요, 탈락된 9,700명은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들입니다(삿 7:6).

기드온의 300인이 정예병이란 표현은 어디도 없습니다. 탈락된 9,700명도 두려움에 떨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물 들이켜는 300인의 자세가 더 좋았던 것도 아닙니다. 개가 핥는다는 표현과 무릎을 꿇었다는 표현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가 핥듯 마신 300인의 자세가 좋았다거나, 300인의 용맹을 노래한다면, 그건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승리와 성공과 대규모의 실적엔 인간의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으로 착각하는 그 육신적 생각 말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돈과 힘으로 나대지 않습니다. 주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게 소명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