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가슴 아픈 갑질 문화 _ 남웅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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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가슴 아픈 갑질 문화

<남웅기 목사_바로선교회>

 

주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할 교회가 갑질을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망령됨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신조어로 크게 주목 받는 말이 있다. 소위 ‘갑질’이란 말이다. 같은 어감의 말로는 ‘유세(有勢)’라는 말도 있다. 비록 한자어이지만, 유세하다, 유세부리다. 유세떨다 등등의 말은 고유어나 다름없다. 요즘은 거의 쓰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 물론 갑질이란 말로 인해 갑이 하는 모든 일이 부정당해선 안 된다. 갑을 관계가 법률관계이든 계약관계이든, 상식 예절상의 관계이든 갑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요구요,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갑질로 비난받아야 한다면, 을에 대한 과도한 권리행사나 횡포, 무리한 요구나 무례한 처사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언론에 오르내렸던,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갑질 사례로는 프랜차이즈 가맹점 갑질, 육군 대장 내외간의 공관병에 대한 갑질, 대한항공 사주 일가족이 보인 갑질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만이 아니다. 이 사회 모든 분야마다 갑을관계로 연결되어 있고, 갑은 제 권한을 남용하는 데 익숙해 진 것 같다. 그게 바로 권력의 맛일지 모른다. 어느 조직, 어느 현장인들 사람 사는 세상에 갑질이 없는 곳은 없을 것 같다.

처음 만난 아이들도 잠시만 어울려도 벌써 저들 사이엔 힘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힘과 지혜와 집안과 리더십의 우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잘 놀다가도 한바탕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건 서로 간에 우열을 판가름하는 과정이라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어린 그들 간에도 갑의 횡포가 일어날 수 있다. 을은 갑의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거나 을의 심부름을 군말 없이 들어주기도 한다. 그 경우 갑이 반드시 불량학생이어야만 그런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다. 얌전하고 선량한 아이도 그런 갑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상대방이 내 말을 잘 들어주기나, 내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위치에 있거나, 내가 그의 약점을 쥐고 있으면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그 본성이 게으르고 미련하고 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남보다 빼어난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그것을 드러내거나 뽐내고 싶어진다. 학벌도 그렇고 지식도 그렇고 실적도 그렇다. 그건 사실 제어하기 어려운 욕망이다. 그로인한 남용이 타인에겐 밉상이 되고, 상대적으로 약한 을인 당사자에겐 고통과 모욕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같은 자랑거리라도 더 빼어나거나 더 많이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 우월감을 갖게 되어 있다, 그 우월감에 대한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면 그것이 곧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한 횡포가 되고 무례가 된다. 또한 그것이 일상화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는 만무방(염치가 없이 막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자가 만무방이 되면 딱하기라도 하지만, 모든 것을 가졌거나 어느 한 분야라도 빼어난 인사가 만무방이 되면 역겹고 난감하다. 그가 사회의 유명인사일수록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요, 그가 한 조직의 수장이라면 그 조직은 급기야 주저앉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근 그러한 실 예를 직접 목도하면서 몸서리치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처럼 갑질 문화는 못난 짓이요, 부끄러운 일이요, 스스로 망할 짓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누구도 이러한 만무방의 못난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우리 중엔 물론 갑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전혀 갑질을 하지 않는 이도 많은 줄 안다. 그러나 대부분 을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지, 갑의 위치에 있으면서 스스로 을의 자리로 내려앉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우리 인생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인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갑질 문화에 대해 가슴 아파할지언정 대놓고 비난할 입장은 못된다. 비난해선 안 된다 함은 누구도 그 비난에서 예외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도 똑 같은 행위를 하면서 남의 그 행위에 대해 비난하고 성토하는 것만큼 낯간지러운 일은 없다. 최근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이 피감기관의 돈으로 해외출장을 다녀온 것으로 인해 정치권의 융단폭격을 받고 마침내 사임한 사례가 있다. 그런데 사실은 피감기관의 돈으로 해외출장 가는 일은 거의 대부분 국회의원들의 관행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신들도 예외 아니면서 “어떻게 국회의원이 피감기관의 돈으로 해외출장을 다닐 수 있느냐?”며 성토한 그들을 보면 ‘낯 두꺼워야 정치할 수 있다’는 옛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갑질 문화가 세상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도들도 동일하게 자행하는 일이요, 그들이 속한 교회 역시 이 문화에서 예외가 아니란 점은 슬픈 일이다. 또한 성도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목회자 세계인들 어디 별다른 점이 있는가? 세상은 원래 타락한 세상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와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요, 게다가 목회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보여줄 소명으로 부름 받은 이들 아니던가! 그런데 똑같은 갑질을 자행하면서 세상만 규탄하고 앉았다면, 낯 두꺼운 정치인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교회(목회자와 성도)는 무엇보다 손해 볼 줄 알아야 한다. 손익을 따지는 건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약자 앞에서 이익을 챙기려고 드는 강자의 모습은 갑질의 전형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자기 힘을 과시하지 않아야 한다. 힘이 있으면 과시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에도 가진 힘을 드러내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유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나보다 약한 자가 나로 인해 상처받지 않도록 유의하는 게 곧 사랑이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겸손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증거 해야 할 교회가 행여 갑질을 행한다면, 그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감당할 수 없는 망령됨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