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의 경건을 위한 바울의 교훈 (디모데후서 3장 12-17절을 중심으로)
< 이복우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제(奠祭)와 같이 부어지고 떠날 시각이 가까웠으며,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6-7)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cf. 딤후 4:9-10, 13, 21),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쓴 유언장과 같은 편지이다. 디모데후서 3장 12-17절은 그 내용들 중의 하나이다.
이에 앞서 바울은 “마지막 날들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이라”(딤후 3:1)고 말한다. 이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딤후 3:2) 타인을 “비방하며”(딤후 3: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더 사랑한다”(딤후 3:4)고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딤후 3:5).
하지만 성도는 이러한 때에도 변함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딤후 3:12). 이를 위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17절에서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1.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
먼저, 사도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14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3절과 14절이 “그러나 너는”(cf. 딤후 3:10)이라는 표현으로 강하게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조되는 내용은 “더욱” 악하여 진다”(13절)와 “거하라”(14절)이다.
전자는 악한 것에서 더 악한 것으로 ‘나아가다, 전진하다’(progress, advance)는 뜻이다. 이 단어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딤후 2:16)는 말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것과 대조되는 14절의 “거하라”는 말은 ‘머물다, 거주하다, 체류하다’는 뜻이다.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악의 진보를 통하여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딤후 3:13).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도가 이와 같은 상황에 동화되지 않고 경건하게 사는 비결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진’이 아니라 ‘머묾’이다. ‘나아감’이 아니라 ‘거함’이, ‘진전’이 아니라 ‘체류’가 경건의 비밀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머물고 거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배우고 확신하는 것 안”에 머물러야 한다. 경건한 성도에게는 머물러야 할 울타리가 있다. 넘어가면 안 되는 한계가 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이 제한 ‘안’에 확고부동하게 머물러야 한다.
사도 요한도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요이 9; cf. 요일 2:24)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배우고 확신하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지 말고, 그것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배우는 것과 확신하는 것은 별개의 다른 둘이 아니다. 배움과 확신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확신 없는 배움은 단순한 죽은 지식이며, 배움 없는 확신은 광신이요 미신이다. 배우지 않으면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며, 확실한 믿음은 배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배움에서 확신이 나오고, 확신은 배움을 수단으로 한다.
2. 두 가지 앎(딤후 3:14b-15)
그러면 성도가 악에서 더 큰 악으로 나아가지 않고 배우고 확신한 것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 둘을 ‘안다’는 말로 설명한다. 하나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아는 것이며(딤후 3:14b), 다른 하나는 성경을 아는 것이다(딤후 3:15). 전자는 배움의 수단인 교사에 관한 것이며, 후자는 배움의 내용인 성경에 대한 것이다.
1) 참된 교사
성도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실한 교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14b)라고 말한 것이다.
디모데는 여러 사람에게서 성경을 배웠다(14b). 먼저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이 말씀은 사람이 성경을 배우고 확신한 것에 거하기 위해서는, 또한 성도가 경건한 자로 살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훌륭한 성경 교사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면 자녀의 신앙에 대한 책임이 어머니에게만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을 디모데의 아버지로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1:2), “내 아들”(2:1)이라고 부른다(cf. 딤전 1:2,18).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디모데의 영적 아버지로 선언하는 것이다.
디모데의 친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행 16:1). 그래서 디모데는 친아버지로부터 신앙을 배울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영적 아버지인 바울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영적 아버지인 바울에게서 성경을 배웠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딤후 1:13). “내 아들아 …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딤후 2:2, cf. 딤후 3:10-11).
그러므로 디모데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목회자요 신앙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가르쳐 준 육신의 어머니와 영적 아버지인 바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 경건한 성도로 살기 위해서는 육적이든 영적이든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다시 말해 부모가 최고의 성경 교사이어야 한다.
경건한 신앙을 위해서는 경건한 교사가 있어야 한다. 악한 시대를 이기고 경건을 가능케 하는 배움과 확신은 좋은 교사를 통하여 가르쳐지고 계승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부모가 이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교사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바울이 성경보다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딤후 3:14-15).
여기에는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다. 좀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은 성경 교사가 성경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이단들이 우리와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도 우리와 전혀 다르게 가르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단에 빠지고 멸망에 이르는 것은 성경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문제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성경보다 교사가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도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그들로 인해 교회가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후메내오와 빌레도이다(딤후 2:17). 그들은 망령되고 헛된 말로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갔다(딤후 2:16). 그들은 진리에 관하여 잘못되었다. 이것은 악성종양과 같은 것이었다(딤후 2:17). 특히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렸다(딤후 2:18). 이처럼 거짓 교사는 진리를 대적하고 믿음을 파괴한다.
또한 디모데의 교회에는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으며 도리어 간지러운 귀를 긁어 자신들의 욕심을 만족시켜 줄 거짓 스승을 많이 두었다(딤후 4:3). 이들은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이야기를 따랐다(딤후 4:4).
그러므로 배우고 확신한 일에 머무는 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한테서나 배우면 절대로 안 된다. 이 세상에는 거짓 선생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딤후 4:3-4). 그러므로 참된 선생을 만나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이다.
2) 성경
이와 함께 성도가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딤후 3:15a). 이 말씀은 성도가 성경을 배우는 것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교훈한다.
① 시기
먼저 성도는 “어려서부터”(baby, infant, childhood) 성경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어리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나이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언제부터 성경을 배우고 가르쳐야 할까?
신약성경에서 ‘어리다’라는 “어리다”라는 말은 뛰어 다닐 수 있는 어린 아이(cf. 눅 8:16-17)만이 아니라 젖먹이와 심지어는 엄마의 뱃속에 있는 태아까지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다는 것은 그가 모태에서부터, 갓난아이 때도, 그리고 어린아이 때에도 성경을 배웠다는 뜻이다. 이처럼 성경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즉 모태에서부터 배워야 한다.
또한 바울은 청년 디모데에게 성경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말한다(딤전 4:13). 나아가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딤후 2:15), 가르치라고 말한다(딤후 2:24; 4:2). 이에 더하여 바울은 장로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라고 말함으로써 장년이 되어서도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며 가르칠 것을 말하고 있다(딤전 5:17).
따라서 인간은 그의 태동부터 삶의 전 과정 동안 내내 성경을 배워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어려서부터”라고 말함으로써 성경을 배우는 시작에 대하여는 밝히지만 그 끝에 대하여는(∼까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성경을 배우는 데는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다.
② 범위
또한 성도는 성경 전체를 골고루 배워야 한다. 본문의 ‘성경’이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거룩한 문자들’ 또는 ‘거룩한 기록물들’이라는 뜻이며, 복수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이 여러 권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16절은 “모든 성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되 모든 성경을 골고루 배워야 한다. 그 이유는 ‘모든’(16절)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고, 성경은 전체가 연속성과 통일성 속에 있으며, 신구약 간에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중 어느 하나라도 배척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모든 성경을 골고루 배우고 전체 속에서 부분을 이해해야 한다.
③ 기록성
이와 함께 성도는 성경을 어려서부터, 그리고 전체를 배우되 반드시 ‘기록된’ 성경을 배워야 한다. 본문의 “성경”이라는 말은 문자로 기록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치 성경처럼 믿고 추앙하는 이상한 신자들이 많이 있다. ‘기록된’ 성경이 아닌 허황된 공상이나 꿈과 같은 것들을 성경이나 그 이상으로 신뢰하는 것을 자주 본다. 하지만 문자로 기록된 성경 이 외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고 말씀하심으로써 기록된 성경(구약)만을 인정하셨다.
바울 사도도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 4:6)고 말했고, 빌립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할 때 “모세가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요 1:45)라고 말함으로써 기록된 성경을 최종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요 20:31).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것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고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본이 되고 깨우침이 되기 위한 것도 기록된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친필로 문안함으로써(고전 16:21) 그것을 자신의 편지라는 표시로 삼았고(살전 3:17), 사도 베드로도 사도 바울이 쓴 편지를 성경으로 인정하였다(벧후 3:15-16).
나아가서 요한계시록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계 1:3)고 말씀하며, 특히 두루마리의 말씀을 더하거나 제하지 말 것을 경고함으로써 기록된 말씀에 최종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계 22:18-19).
그러므로 기록된 성경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르치거나 배우면 절대로 안 된다. 문자로 기록된 성경 이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성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성경의 기원
이제 사도 바울은 성경의 기원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한다(딤후 3:16a). 여기서 감동이라는 말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받은 감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호흡으로 불어내셨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 속에 기운을 불어 넣었다든지, 혹은 작품 속에 불어 넣어 독특한 성격을 가지게 했다는 것이 아니고, 기록은 사람이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불어내진 것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벧후 1:21). 그렇다고 해서 인간 저자들은 그냥 받아쓰기를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격과 기질과 배경과 경험 등을 충분히 사용하셔서 각자로 하여금 적당하고 독특한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유기적 영감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했으며, 신적인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성경의 완전성
성경은 완전하다. 성경은 완전하신 하나님에 의해 감동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성경의 완전성을 보장한다. 그런데 성경이 완전하다는 것은 그것의 질(質)과 양(量)에 있어서 모두 완전하다는 뜻이다.
먼저 질적으로 보면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완전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分別)하라”(딤후 2:15)고 말함으로써 말씀이 진리라고 설명한다.
성경은 거짓 교사들의 망령되고 헛된 말이 아니며(딤후 1:16) 허탄한 이야기도 아니다(딤후 4:4). 성경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바른 말”(딤후 1:13)이며, “하나님의 견고한 터”(딤후 2:19)이다.
또한 성경이 진리인 이유는 말씀하신 분이 미쁘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기에 자기를 부인할 수 없다(딤후 2:13).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며(딛 1:2)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다(민 23:19).
또한 성경은 양적으로도 완전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씀에서 “모든”은 양을 나타내는 말이며, 그것이 전부라는 뜻으로서 양적 완전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전 4:6)는 것에는 기록된 말씀으로 충분하고 완전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기록된 것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말씀도(계 22:18-19) 성경의 양적 충분성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질과 양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다.
2) 성경의 영원성과 불변성
성경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며(딤후 1:9; cf. 딛 1:2) 사망을 폐하신 분이다(딤후 1:10).
하나님 앞에서 사망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분이다(딤후 1:10). 그래서 그분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는 것이다(딤후 4:18). 이처럼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감동으로 된 성경도 영원하며 불변한다. 성경의 영원성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기초하고 있다.
3) 성경의 비속박성
성경은 속박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속박당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 분의 말씀도 속박되지 않는다.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환경이나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제한을 당하지 않는다. 바울은 매였어도 그가 전한 복음은 매이지 않고 더욱 담대히 전해졌다(빌 1:13-14). 바울에 의해 선포된 말씀은 “모든 족속”(cf. 마 28:19)이 듣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딤후 4:17). 그는 분명히 모든 족속에게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전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은 매이지 않으므로 모든 족속이 듣게 될 것이다.
4) 성경의 계시성
성경은 계시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신 자신의 계획과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셨다(딤후 1:9-10).
하나님은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계시자인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도 계시의 책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의 영광과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역사하심 등을 계시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나타내신다. 성경을 보면 인간이 바로 보인다.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히 4:12).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패역함을 극명하게 대조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만물의 시작과 그들의 상태와 운명에 대하여 명확하고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며, 인간과 만물에 대하여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을 바로 알기 원하는 사람은 성경을 열어야 한다. 성경을 열면 하늘이 열린다. 성경을 열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인간과 만물이 열린다.
4. 성경의 목적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성경의 목적에 대하여 말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일으켜 구원을 받게 한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을 주신 것을 믿게 된다(딤후 1:9-10, cf. 벧전 1:23). 그러므로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도 성경을 열어야 한다. 그리하면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할 것이다.
또한 성경은 성도의 온전함을 목적으로 한다. 성경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능히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만든다. 즉 성경의 신적 기원이 인간의 온전함을 보증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온전함은 성경이 주는 유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에 유익하다. 성경은 가르치고, 잘못된 것을 꾸짖고 바로잡아 교정하며, 의로움으로 훈련시키기에 유익하다. 성경은 이런 유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만든다. 이처럼 성경은 성도의 온전함을 위하여 있다.
5. 맺는 말
우리 모두는 말세의 고통하는 때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악한 것에서 더 악한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성도는 이들과 달리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머묾으로써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을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는 신실한 교사가 필요하다. 또한 성도는 모태에서부터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성경을 알아가며, 성경 전체를 알고, 반드시 기록된 성경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 힘써야 한다.
나아가서 성도는 성경의 특성을 알고 성경의 신적 권위와 가르침에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될 수 있는 것은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고 그것 안에 머묾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