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편지
희생양 만들기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월드컵의 계절. 전 국민의 정서가 승리와 패배에 따라 요동친다. 이기면 여유가 생겨 함께 뛴 모두가 잘 해 준 덕이라고 서로 북돋운다. 그러나 지면 모두의 책임이 아닌 그 누구 때문에 졌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게 패배감을 빠르고 쉽게 극복하려는 우리의 습관성 꼼수이다. 그래서 눈에 띄는 실수가 가장 많은 자를 지목하고 패배의 원인을 그에게서 기어이 찾아내어 책임의 형틀을 씌운다.
지난 지방 선거에서 참패한 모당의 수습 과정도 그 틀에 갇혔다. 각자의 잘못을 찾고 인정하며 응당한 대가를 함께 지불하기보다는 몇몇 비난의 대상자를 뽑아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광야로 내쫓아 희생양으로 삼는 게 경제적 수습법이라는 오해의 발로이다.
또한 실제로 사태를 책임져야 할 당사자의 처세도 비슷하다. 세상의 지탄이 극에 달할 때 정직하게 자아를 내려놓고 책임을 지려 하는 현자가 많지 않다. 로마를 화염의 광란으로 내몬 네로는 군중이 두려워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당대의 정치가, 철학자들도 그 죄악에 동조했다. 한편, 군중 또한 기독교에 대한 기왕의 편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기에 네로의 술수에 쉬 넘어갔다. 폭군 네로를 섬긴 로마 시민들도 역사적 오류의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다.
이런 점에서는 중세의 마녀사냥도 일면 신학적 논쟁의 결과물만이 아니라 군중의 분노의 물길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한 희생양 사냥이었을 터이다. 더욱이 관동 대지진 때 일제가 혼란에 빠진 자국민들의 비감과 원성을 무마코자 애꿎은 조선인들에게 죄를 덮어씌운 만행은 ‘희생양 만들기’가 시대를 불문하고 발병하는 독한 악습임을 증명한다. 분명 오류의 일단이 각자에게 있음에도 짐짓 자신들의 책임이 없음을 강변하는 수단으로 희생양을 만드는 무서운 고질은 우리에게도 있다.
한국 축구의 현재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단지 그 누구 때문에 곤경에 처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실패의 허탈감을 희생양 만들기로 채우려 한다. 한국 교회도 그렇다. 난국의 책임을 어느 교단 혹은 누구에게 씌워 해결하려는 셈법은 빗나가게 마련이다. 방초건 독초건 그것을 싹 틔우고 키운 토양은 다름 아닌 우리다. 성공과 실패, 승리도 패배도 우리 모두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