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편지
빨간 동그라미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집안 대청소를 하다 보면 간혹 생뚱맞은 것들이 나타난다. 지난 추억들을 못 잊게 하는 상징적인 물건들. 옛 사진, 일기장이라든가 특별한 애환이 깃든 생활 용품 같은 것 말이다.
언젠가 둘둘 말려 구석에 박힌 달력을 발견했다. 먼지가 솜처럼 엉겨 있어 통째로 버리려는데 문득 머리에 뭔가 스쳐 지나갔다. 그 달력을 죽 펴서 한 장씩 넘겨 보았다. 꽃이 만발한 봄날의 풍경 사진 밑에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된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생신날이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바쁜 일상에 잊고 지나칠까 봐 눈에 띄는 표시를 해 두고 어머니를 찾아뵙곤 했었다.
그런데 그건 오래 전의 달력. 어머니는 그 해에 병상에서 생신을 맞이하셨고 그 오월의 달력 종이 한 장을 간신히 넘기시고는 장미의 계절 유월이 되자마자 하늘나라로 가셨다. 사실 이전의 달력들에도 죄다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지만 그해 오월의 동그라미는 유독 붉은 장미꽃을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을 닮았었다. 그러니 가슴에서 지워지기 힘들다.
그렇다 한들, 달력에 동그라미를 아무리 빨갛게 쳐 놓았다 한들 그날 뭐 특별하게 잘해드린 게 있었던가. 돌아보면 부끄러움뿐이니 상투적 인용문이 돼 버린 옛 시인 정철의 ‘어버이 살았을 때 섬기기만 다하여라’는 충고를 아무리 되새겨도 역시 만회할 기회는 없다.
이제는 해마다 어머니의 귀천하신 날을 기념하려 유월의 달력에 애써 새빨간 동그라미를 쳐 놓는다. 하지만 어찌 어머니 생전의 그 장밋빛 빨간 동그라미에 비하겠는가. 아무리 가슴 싸한 추억과 아쉬움과 그리움이 하늘처럼 번져온다 한들… 자꾸만 그 빨간 동그라미가 목울대로 굴러들어 와 촉촉이 붉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