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특강| 아브라함의 축복<1>_김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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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특강

아브라함의 축복<1>

 

< 김진수 교수_합신|구약학 >

 

아브라함의 축복을 통해 구약의 축복의 성격을 이해하고 우리가 바라볼 축복이 무엇인지를 살펴 봄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야웨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이 아브라함 축복의 핵심

언약의 축복을 향유하려면 하나님께 절대적 믿음과 충성이 요구되며, 그것은 말씀의 능력으로부터 온다

 

  오래 전부터 한국교회에는 ‘성경이 말하는 축복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다. ‘축복’에 대한 오해는 ‘기복신앙’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그릇된 신앙형태를 낳기에 이러한 논의는 필요하다. 차제에 필자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축복의 문제를 접근함으로써 성경적인 축복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은 구약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이자 신구약을 통틀어 모든 믿는 자들의 표본이 되는 인물(믿음의 조상)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 어떤 것들인지를 살펴봄으로써 구약이 가르치는 축복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오늘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수 있다.

 

  창세기 12:1-3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곳에는 ‘복’이란 낱말이 다섯 번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등장과 함께 ‘축복’이 강조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아브람 이전 시대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 이전 시대를 다루는 창세기 1-11장은 창조와 타락, 그리고 타락이 가져온 결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 죄로 인해 어떻게 망가지고 마침내 회복불능의 상태로 전락하게 되고 말았는지를 목격한다: 아담의 타락 → 가인의 살인 → 라멕의 살인 → 노아 홍수 → 바벨탑. 이처럼 아브람 이전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죄와 그것이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이다. 놀랍게도 창세기 1-11장에는 ‘저주’에 대한 언급 또한 다섯 차례 나타난다: 1) 뱀의 저주(3:14), 2) 땅의 저주(3:17), 3) 가인의 저주(4:11), 4) 땅의 저주(5:29), 5) 가나안의 저주(9:25). 이처럼 아브람은 ‘저주’로 특징지어지는 세상을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의 등장과 더불어 ‘축복’이 강조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아브라함의 등장은 세상에 어떤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이 변화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는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 있는 세상이 ‘축복’된 세상으로 바뀌게 될 것이란 말이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등장은 세상 편에서 볼 때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복음의 내용을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해서 아브라함 이전 시대를 특징짓는 ‘저주’의 현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등장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바벨탑 사건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상 바벨탑 사건은 타락과 그로 인한 파괴적 결과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기에 우리의 목적에 더욱 잘 부합된다.

 

  바벨탑 사건의 핵심은 11:4에 나타나 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큰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큰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 문제인가? 성경 어느 곳에서도 큰 도시의 건설 그 자체가 문제시 되는 경우는 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짓고자 하는 큰 도시가 어떤 성격의 것이냐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도시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배제한 인본주의적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한 장소로서의 도시이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바벨성을 건설하고자 한 사람들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 이름을 내고”라는 표현 속에 그들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우리 이름을 낸다’는 말은 인간이 자신의 힘과 능력을 통해 스스로의 명성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와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안전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바벨성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서 스스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스스로의 명예를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건설하고자 하였던 성은 이렇게 오만한 인본주의적 사상의 결정체였다. 더군다나 그들은 높은 탑을 쌓음으로써 그들의 뜻을 과시하고 영구화하고자 하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벨성 건설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극치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도를 묵과 하실 수 없었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뿔뿔이 흩어지도록 하셨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브라함의 등장은 이런 비극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의 등장과 더불어 강조되는 ‘복’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앞에서 우리는 바벨 사건의 핵심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역이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의 등장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책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하여 인간의 반역이 극복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 안에 잘 나타난다. 바벨 사람들은 스스로 큰 도시를 이루고, 스스로 이름을 내고자 하다가 오히려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등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변화된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브라함의 축복의 중심내용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고대 근동에서는 종종 사람과 사람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 언약을 맺는 관습이 있었다. 이 때 언약은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을 사랑과 충성의 관계로 굳게 결속하는 기능을 하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를 무조건적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으며, 아브라함은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 절대적 충성을 받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이런 언약관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다음 말씀에 잘 표현되고 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의 축복이란 곧 언약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야웨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이 아브라함 축복의 핵심이란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가 구약이 말하는 축복의 본질이라면, 그러한 관계가 어떻게 가능해지며, 어떤 모양새를 갖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의 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언약의 축복’(=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그에게 있는 어떤 장점이나 훌륭한 요소들 때문이 아니었다. 창세기 저자는 부름 받을 당시 아브라함의 인간 됨됨이에 대한 일체의 묘사를 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가족관계가 간단히 소개될 뿐이다(cf. 창 11:27-32). 여호수아 24:2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집안은 원래 우상을 섬겼다고 한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자요, 바울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엡 2:1).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불러내셔서 자신과의 친밀한 교제 속으로 이끌어 들이신 것이다.

 

  이처럼 언약관계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도적이지만, 그것은 인간 편에서 책임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모든 사회, 경제적 안전망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믿음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답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압도되어 순종의 자리로 이끌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無)에서 유(有)를 불러내는 창조적 능력이 있다(창 1:3).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한 바울의 가르침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

 

  앞에서 인간 편에서 언약의 축복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믿음과 충성이 요구되며, 이런 믿음과 충성은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제 이와 같은 언약의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살펴보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으며(12:1),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12:7). 후에 하나님은 한 특별한 의식을 통하여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을 엄숙히 보증하기까지 하셨다(창 15:18-21). 이 의식에서 하나님은 횃불 형상으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신다. 이는 어떤 일이 있어도 땅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땅이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언약 백성이 우선 민족의 형태로 형성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거주할 장소가 있어야 그곳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이 약속된 것은 창조 당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이 주어진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말하자면 가나안 땅은 새로운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다. 그런 까닭에 구약은 가나안 땅을 매우 이상적인 장소로 묘사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민 14:8), ‘심히 아름다운 땅’(민 14:7), ‘물이 풍부한 땅’(신 8:7).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심으로써 그곳에서 그들과 더불어 친밀한 관계를 나누고자 하셨다. 말하자면 가나안 땅은 신랑과 신부가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사는 신혼집과 같은 곳으로 의도된 장소였다(호 2:19).

 

  이와 같이 땅은 그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외적 틀로서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때 그 땅에서 갖가지 재앙을 경험하였고, 마침내 땅을 잃어버리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이야기 하면서 땅의 회복에 대해 말하였다(호 2:21-22; 욜 2:21-27; 암 9:13-15). 이처럼 구약의 성도들에게 ‘땅’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현하는 장소로서 의미를 갖는다. 즉 땅의 축복에 있어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중심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다음 찬송가 가사이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따라서 ‘땅’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할 ‘천국’의 예표요 그림자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땅을 약속 받았으면서도 평생을 나그네로 산 것에서도 암시된다.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장소가 아닌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곳을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에서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예비하실 ‘한 성’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히 11:16).

<다음 호에 계속>

* 새해를 맞아 축복의 참 의미를 성경적으로 개진한 김진수 교수의 글을 2회 분재한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