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회의 400주년을 기념하는 새해
2017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였다면, 2018년은 도르트회의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58명의 화란인과 8개국에서 온 28명의 목사와 신학자는 1618년 11월~1619년 5월에 화란의 도르트(Dordt)에서 열린 회의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로 알려진 신경(信經)을 작성하였다.
첫째 바른신학의 관점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은 오직 “성경, 은혜, 믿음, 그리스도, 하나님께 영광”을 받는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들이 기념하였다면, 도르트회의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견인”이란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동의하는 장로교 같은 교단들이 기념한다.
도르트 신경은 종교개혁의 5대 모토보다 더 먼 원인까지 살피며, 하나님의 성정을 더욱 드러냈다.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를 인하여 구원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을 보시지 않고 택한 자들에게만 저항할 수 없게 은혜를 주시고 끝까지 붙드신다. 이처럼 5대 모토는 5대 교리를 통하여 그 의미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도르트 신경은 칼빈주의 5대 교리로 간단히 환원되지 않고, 훨씬 더 풍성하다. 도르트 신경은 성경을 내내 지속적으로 인용한다. 즉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다. 도르트 신경을 숙지하면 성경을 더욱 정확하고 깊게 해석할 수 있다. 목사들은 바로 이 깊은 해석을 쉽게 성도들에게 전해야 한다. 도르트 신경을 정확하게 깊이 이해하는 목사일수록 신학적으로 딱딱하게 전하지 않고, 성경을 통하여 삶을 비유로 하여 쉽고 재미있게 전할 것이다.
합신과 대신(수호)의 교류위원들이 첫 번째 교류를 개혁주의 신앙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도르트회의400주년 기념세미나를 진행하기로 한 것은 적절하다. 신학과 정서의 일치 없이 물리적 필요를 위해 시도한 교단간의 교류와 연합은 그간 더 큰 분열과 잡음을 불러왔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둘째 바른교회의 관점에서, 도르트회의도 웨스트민스터 회의처럼 교리만이 아니라 “교회 질서(Church Order)”(정치, 예배, 권징 등)까지 만들었다. 이미 합신은 웨스트민스터 회의 결과물을 반영한 정치와 예배와 권징을 헌법에 갖고 있다. 따라서 합신인은 도르트 회의의 “교회 질서”를 읽으며 예배순서 하나, 정치적 사항 하나도 소견과 효율이 아니라, 성경에 따라 헌법에 근거하여 현재를 반영해야함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장로제가 감독제보다 낫다는 주장을 의원내각제가 대통령중심제보다 낫다는 주장쯤으로 여긴다. 예배모범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다만 감동과 초월의 예배를 원한다. 따라서 합신인은 헌법의 정치 준수가 얼마나 질서의 자유와 감동을 가져오는지, 그리고 예배모범의 따름이 얼마나 신령과 진정의 은혜를 가져오고 현재를 반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옳다는 당위성의 외침으로는 부족하고 구현해야 한다.
교회는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만 받아들이는 동호회가 아니다. 교회에 오는 다양한 이들을 크게 환영하며, 격려하고 권면하여 사랑과 말씀으로 일치되게 해야 한다. 바른교회는 진리의 구현이란 의식 하에서 오랜 기다림과 넓은 마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셋째 바른생활의 관점에서, 도르트회의 후 400년이 흐른 기간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의 장단점이 드러나기에 충분하다. 로저 올슨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중심을 두는 칼빈주의는 정확한 신학과 교회 질서를 위해 비판과 분리와 경직과 지성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빠지기 쉽다.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전도의 열정과 사회적 아픔의 동참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쉽다. 칼빈주의자는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사랑에도 깊이 빠져들어 더 너그럽고 포근하고 열정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먼 원인을 생각할수록 돈과 성(性)에서 거룩하고, 거짓 증언과 아부를 피하고, 작은 이익 때문에 신자의 자존심과 품위를 팔면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 진리와 사랑의 실천 없이 도르트 신경이 옳다라는 주장은 조선시대에 예송 논쟁에 빠진 당파주의자의 모습을 연상시킬 뿐이다. 합신 교단은 도르트회의 400주년의 기념을 남을 비판하고 자신이 옳다는 위안과 위시로 사용해서는 안 되고, 그것의 겸손한 실천과 현재에의 적용으로 나가야 한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와 지혜를, 그리고 모든 일에는 사랑과 거룩을 더욱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