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신해설 41> 원죄(1) – 전면적 부패와 영적 무능력 <제6장 4항>_김병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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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1) 전면적 부패와 영적 무능력 <64>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6장 4항: “원죄로 인한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리고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이끌려져 있고, 온갖 범죄를 실제적으로 범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긍휼 없이 어떤 사람도 구원의 소망 없어

본 항은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하여 그것이 아담의 후손이 짊어져야 했던 원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두 가지 설명, 즉 죄의 오염과 죄책 가운데 하나를 교훈합니다. 그것은 죄의 오염과 관련한 것으로, 본래는 순전하였던 인간의 본성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 부패함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 교훈입니다.

 

선과 관련하여, 사람은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이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못한 자들이 되었고, 또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온갖 선과 대립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롬 5:6; 7:18; 8:7). 악과 관련하여, 사람의 마음은 선의 결핍 혹은 선과의 반대 또는 대립에 있으며(창 6:5; 8:21; 롬 3:10-12), 온통 악을 향한 성향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이러한 상태에 처하게 된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결국 온갖 범죄를 실제적으로 범합니다. 요컨대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한 부패는 원죄로 인한 결과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범죄, 곧 자범죄를 낳는 원인이 됩니다(약 1:14-15; 엡 2:2-3; 마 15:19).

 

누구나 죄의 오염과 죄책 가지고 있어

 

신앙고백서는 본 항에서 일반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소위 ‘선의 결핍 또는 결여’(privatio boni)로서의 죄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줍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라고 고백하고 있는 표현은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타락한 이후 인간에게 선을 기대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선의 결핍 또는 결여’로서의 죄의 이해는 마니교의 주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마니교는 선과 악을 각각 실체로 보는 이원론을 말합니다. 영원한 두 실체들이 서로 존재하며 투쟁하는 이원론의 형이상학은 결국 선뿐만 아니라 악의 실체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악의 책임을 부가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으므로 악을 선과 같은 실체로 보는 견해를 부정하고, 악이란 마땅히 있어야 하는 선의 결핍 또는 결여로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란 ‘선의 결핍 또는 결여’라고 할 때, 그것이 말하고 있는 바는 죄란 결코 하나님께서 만든 어떤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죄가 실체라면 모든 실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 또는 악을 만드신 분이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의 창조자가 아니시기 때문에 이러한 이해는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선하시며 모든 선의 기원이시고 또 그가 만드신 만물의 실체들이 선하다는 점에서, 선은 하나의 실체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죄는 실체가 아니라 선한 실체가 결여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선의 결핍 또는 결여’로서의 죄의 개념은 단순한 ‘선의 부재’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선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한 만물의 실체이므로 마땅히 존재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없다는 사실을 반영할 때, 선의 부재는 선의 결핍 또는 결여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습니다.

 

죄란 마땅히 있어야 하는 선이 결핍 또는 결여된 부정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곧 헤르만 바빙크가 예를 들 듯이, 돌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눈의 부재를 말하지만,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은 눈의 결핍 또는 결여로서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눈이 없는 돌과 달리, 눈이 있는 사람은 마땅히 보아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결핍 또는 결여된 부정적 상태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죄란 선의 결핍 또는 결여된 상태

 

그러나 신앙고백서가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라고 표현하고 있는 죄란 단순히 물리적 의미에서 선이 결핍 또는 결여된 상태를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죄는 윤리적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돌과 사람의 예를 따라 말한다면, 윤리성이란 이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성이 없는 짐승에게는 선을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선의 부재를 말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성을 가진 사람은 본래 창조 때부터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로(posse non peccare) 마땅히 윤리성이 드러나도록 만들어졌으므로 그가 윤리에 어긋날 때 그것은 선의 부재가 아니라 선의 결핍 또는 결여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의 결핍 또는 결여는 단순히 어떤 물리적 의미에서의 실체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현상으로서 인격적 문제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를 포함하는 생각과 감정의 활동을 낳는 영혼이 자리하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결과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어지는 고백을 통해서 죄가 윤리적인 면에서 인격적 문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타락 이후에 부패하였으며, 그 부패한 본성의 결과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또한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이끌려져 있고 온갖 범죄를 실제적으로” 범합니다.

 

타락한 이후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였다는 사실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20)에서 말씀에서 확인이 됩니다. 이러한 부패성에서 사람은 스스로 원하여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악한 행위를 선택하여 불법을 행하게 됩니다.

 

이렇듯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였으며, 부패한 본성으로 모든 아담의 후손은 죄를 실제로 범하게 된다고 할 때 신앙고백서가 교훈하는 것은 사람의 인성 자체가 변질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인성은 타락의 여부와 관계없이 여전히 동일합니다. 즉 타락 전 아담이나 타락 후 아담은 동일한 인성을 가진 동일한 사람이며, 또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담의 후손들도 타락 전 아담과 동일한 인성을 가진 동일한 인간입니다.

 

아담의 타락이 인간 본성의 부패 가져와

 

신앙고백서가 원죄로 인한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선을 원하지 않으며 행할 수도 없으며 반대하고 오히려 악을 원하며 온갖 범죄를 행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에게 인성의 변질이 나타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성에 선을 미워하고 악을 바라는 성질이 덧붙여졌음을 말합니다. 이 성질은 사람이기 위하여 필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성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인성을 가진 사람에게 덧붙여진 성질이기 때문에 우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패한 본성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사람의 본질을 묻는 것이고, 그 답은 사람이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본질적인 것을 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패한 본성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사람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관련이 됩니다.

 

즉 사람은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이 영혼과 몸을 본질로 가지고 있으며, 다만 선을 원하지 않고 행할 능력도 없으며 반대하고 악을 원하므로 온갖 범죄를 스스로 범하는 성질을 갖게 된 자가 되었다는 것이 물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의 말씀은 동일한 인격이 한 편으로는 죄의 종이 되어 부정과 불법을 행하는 성질을 나타내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에게 종이 되어 거룩함을 이루는 성질을 나타낸다는 점을 밝혀줍니다.

 

동일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성질을 가진 옛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는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는” 성질을 가진 새 사람인 것입니다(엡 4:22-24 참조).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설명한다면 이른바 넓은 의미에서의 구조적 형상을 말하는 것은 인성의 본질적 측면과 관련한 것이며, 좁은 의미에서의 기능적 형상을 말하는 것은 인성에게 부가된 성질의 측면과 관련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4장 2항 ‘사람의 창조’ – 기독교개혁신보 2013.4.12. 참조).

 

인간은 영적 무능력 상태 아래 있어

 

신앙고백서가 본 항목에서 교훈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사항은 부패한 성품으로 인한 죄의 오염이 전면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이끌려져 있고, 온갖 범죄를 실제적으로 범한다”는 진술은 부패한 성품으로 인한 오염이 어떠한 제한이 없이 모든 인격 활동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교훈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르게 갖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매우 필요합니다. 하나는 부패로 인한 죄의 오염은 비단 이성에만 아니라 감정, 그리고 의지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전면성입니다. 사람은 타락한 이후에 진리가 아닌 것을 옳다고 판단하며, 악한 것을 기뻐하며 선택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전면적인 타락의 양상과 더불어 또 다른 하나는 이러한 타락이 자연적이며 도덕적 측면에서의 가능성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신앙고백서가 본 항목에서 말하는 바가 타락한 이후 사람은 더 이상 타락할 수 없이 철저하게 타락해 있으며, 어떠한 선과 악의 양심적 구별도 불가능하고,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한 도덕적인 선도 행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여서는 안 됩니다. 비록 타락한 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도덕적 선과 악의 구별의 능력이 제한 된 수준이지만 여전히 있으며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일반은총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본 항목에서 교훈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적이며 도덕적 무능력이 아니라 영적인 무능력입니다. 원죄 아래 놓인 사람은 누구도 자연적인 상태에서 곧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으며,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의를 이룰 수가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는 전면적으로 근원이 부패한 자이며, 영적인 선을 행할 수가 없는 무력한 자임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범하는 모든 자범죄가 바로 원죄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임을 교훈하며, 죄의 오염으로 인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는 상태에서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새 사람 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긍휼이 도움으로 주어지지 않는 한 어떤 인간에게도 구원의 소망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 신앙적 전제를 본 항목은 밝혀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