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_김기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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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 김기영 목사, 화성교회 >

 

두려움과 사랑, 어느 쪽이라도 약화시키면 반쪽 하나님 섬기는 것

어렸을 때 아이들끼리 하는 말 중에서 이런 말을 주고받은 기억이 난다. “너 거짓말하면 벌 받아!” 그러면 마음에 겁이 나서 주춤하였다.

 

교회 나가는 아이들 중에는 “너 나쁜 짓하면 지옥가!” 그러면 무언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에게서 이런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지금 아이들은 잘못을 해도 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옥을 겁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변한 것일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기에 두려워하는 마음은 신앙이 부족해서 하나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가?

 

최근 몇 년 전부터 성경을 읽으면서, 특히 선지서를 읽으며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두려움을 느꼈다. 매 장마다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여러 가지 재앙의 경고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세히 읽으려니 너무 끔찍한 당시의 상황들을 상상하게 되고, 참으로 생각하기조차 하기 두려웠다. 어떤 때는 대충 빨리 읽고 지나가기도 했다.

 

매 장마다 증거하고 있는 전쟁과 기근과 질병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리는 것으로 이것은 징계나 채찍이라고 하기에는 엄청난 재앙이며 형벌들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불신자가 받는 것은 형벌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것은 사랑의 징계라고 그 성격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선지서의 경고를 사람이 생각하는 징계나 채찍 정도로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 죽어감으로써 결혼 대상이 없게 되자 여자들이 우리가 우리 옷을 입고 우리 떡을 먹을 터이니 남편으로 이름만이라고 부르게 해달라는 날이 오리라! 원수들이 와서 아이 벤 부녀의 배를 가르리라! 기근이 와서 온유한 부녀가 자기가 나은 아이를 먹게 되리라!

 

이러한 일들이 지금 이 시대에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남의 일로만 생각하면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다.

 

그런데 선지서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런 일들이 일어났었다. 이 사실은 예레미야 애가를 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유다 왕은 자신의 눈앞에서 아들이 죽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귀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 동안 징계의 기간을 지나서야 돌아오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왜 이렇게까지 그 백성에게 진노하셨는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그 속성이 죄악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그 이름이 택하신 백성들에게까지 경시당하고, 밟힘을 당할 때 그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밟힘 당하는 것을 허락하심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선지자들의 말씀을 들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결국 하나님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두려운 일들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의미는 두려움과 사랑의 복합어라고 벌코프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정의한 것이 기억난다.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은 그들의 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벌을 내리는 신이지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 반면에 우리 하나님은 두려움과 사랑의 대상이시다. 동시에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을 동시에 가지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 어느 쪽이라도 약화시킨다면 이는 반쪽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으로 바꾸지 말자. 성경의 의미도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쪽으로만 생각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성경이 아니고 내가 만든 성경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혹은 신학을 많이 공부했다고 해서 성경에 다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겠는가? 처음 성경을 대하는 것처럼 마음을 비우고 다시 읽어 본다면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