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그리스도인의 정치의식과 정치 행위_이승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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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강>  

그리스도인의 정치의식과 정치 행위

< 이승구 교수, 합신 조직신학 >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활동은 기독교적 유익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정치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정치 행위를 해야 하는가?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삶의 전반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충실하기를 원해 왔다. 이런 폭 넓은 생각 때문에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곳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곳은 한 치도 없다고 하면서 삶의 전반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해 왔다.

화란에서 한동안 약화된 듯했던 개혁신앙을 19세기 말에 다시 강하게 제시한 아브라함 카이퍼가 “영역 주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를 강조하고 실천하려고 하였는데, 그 이전에도 요한 칼빈이나 요한 낙스 등 많은 개혁 신학자들은 우리의 삶 전반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해 왔다. 사실 카이퍼는 칼빈 등의 성경적 사상이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느꼈으며 그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순히 종교적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정치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한 영역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므로 개혁파 정치관은 기본적으로 정치 영역에도 미치는 하나님의 전적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는 중세의 왕권 수호자들이 주장하던 왕권신수설(the Divine right of the King)이나 귀족들이 주장하던 입헌 군주론을 통한 왕권과 귀족권의 균형 주장,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강하게 나타난 주권 재민(sovereignty of the people) 사상과 대립되는 사상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들이 주권 재민을 강조하고 있고, 우리들도 이에 근거한 민주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권 재민을 분명히 천명하면서도 근원적으로 정치 영역에도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치 방식을 옹호하지만 그 이상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칼빈이 살던 시대는 더 그렇거니와 카이퍼가 살던 시대에도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전적인 “다원적 사회”와는 성격이 달라서 그들이 한 말을 이 새로운 상황에 적절히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이 사회가 세속화된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을 사회 각 영역에 대해 주장하는 방식은 참으로 지혜로워야 하고 사랑에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되면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나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게 될 것이고, 소극적으로도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락한 후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homo homini lupus)의 장소인 이 세상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기득권과 유익을 지키기 위해서 이에 가세하는 형국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세상에 대한 분석의 하나인 헤게모니 이론(hegemony theory)이 옳다고 주장하는 꼴이 되고 만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 속에 교회들이 그런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기득권을 주장하기 위한 방식으로 이 세상 정치 영역에 영향을 미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그것을 위해 정치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활동은 결코 기독교의 유익이나 기독교인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며, 가깝게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정치적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정치적 활동에 열심이어야 한다.

그것을 과연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탐구해야 하는 과제이다. 그것이 희생적 사랑을 보여 주셔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이렇게 구속된 사람들이 또한 피조물의 수준에서나마 그런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신 예수님의 뜻에 부합하며, 기독교의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치적 행위도 구속된 사람의 성격에 부합하는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역사 속에서 나타난 구체적인 예들이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가 영국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정치적 활동을 한 것이 이에 상당히 부합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무역이라는 현실적인 악 앞에서 그것이 대영 제국의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당연시하거나 그것을 필요악으로 용인하였다.

그러나 바르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의식을 적용할 것을 윌버포스와 그의 동료들은 주장했던 것이다. 과거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구속된 사람의 의식에 충실해서 정치적 행위를 잘 감당해 왔다. 우리들도 그렇게 자기희생적인 정치적 활동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던 윌버포스 시대와는 다른 매우 세속적인 세상이어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본질은 같은 것이다. 추상적으로 윌버포스의 사회는 기독교권이기는 했지만 실상 세속적 사회였으니, 그의 설득 노력이 훨씬 쉬웠다고 하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복잡한 한국 사회, 한국 정치의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정치 영역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피하는 것과 정치 영역에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의도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참여 하는 것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이 우리가 회개할 죄악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데 과연 어떤 태도로 참여해야 하는가? 자신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둘째, 그러면서 우리는 정치가 그 자체로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모든 것을 풀 수 있는 열쇠가 경제가 아니듯이, 정치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정치 영역에 관여하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용어로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셋째, 그러므로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는 우선 상대적으로 “덜 악한”(less evil) 것이 실현되도록 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선택의 경우에 있어서도 어떤 것이 덜 악한 것을 드러내는가 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특히 세속 사회에서는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덜 악한 것을 향해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일반 은총 영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진정한 유익을 위해 일단 이런 상황 가운데서는 어떤 것이 덜 악한 것인지를 잘 생각하고 그것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넷째, 그러나 교회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그 선택을 대신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의 할 일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제시하고 그 원칙에 근거해서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면서 깊이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지 않는 것은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권리와 판단 능력을 무시하고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원칙을 가르치고 그 원칙에 따라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양심을 따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일단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각 교회 공동체가 이 상황 가운데서 자기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일을 하면서 모든 것을 귀정(歸正)하실 하나님의 큰 일을 기다려야 한다.

다섯째, 물론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일반 은총 영역을 위해 기도할 때는 언급한 바와 같이 비교적 “덜 악한” 것이 일반 은총 가운데서 선택되도록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반 은총 영역에 대한 우리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의 실현을 위한 기도이기보다는 상당히 허용적인 뜻 내지 소극적인 뜻의 실현을 위한 기도의 성격을 가진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 기도는 결국 특별 은총을 위한 기도로 변하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특별 은총을 받아 제 정신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을 실현하는 데에로 나아가기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그럴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 그 때는 각 사람이 적극적인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기도하고, 선택하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네 교회 안에서 교회의 모든 일들을 이와 같이 해결해 가는 일이 이 세상에서의 그런 실현을 위한 좋은 준비가 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