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뜨락| 세상 떠날 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_나택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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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의 뜨락 >  

세상 떠날 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 나택권 장로, 호산나교회 >

743_9봄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제 그만 하면 됐다”라는

정도의 말은 남길 수 있어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고 사회적으로 안정권에 들어서면 더 높은 자리를 탐내는 등 위치와 자리를 탐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욕망을 가져야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그만하면 되었다고 만족하고는 하지만 이에 끝나지 않는 지나친 욕심은 비극의 씨앗으로 싹트기 마련이다. 약 1:14~15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며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된다.

사람마다 그가 죽을 때 유언으로 하는 말이 제각기 다르겠지만 나름대로 만족한 표현을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즉, 죽을 때 원망을 하거나 후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은 억울해서 차마 죽지 못하는 사람,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 그리고 죽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 앞에서 자기 자신이 살아온 지난 삶을 정리하면서 그래도 만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넉넉지 못한 장사를 하는 집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철학 연구에만 힘쓰다가 80세 죽을 때까지 대학 교수를 지내고 독신으로 지냈을 뿐 아니라 불행한 누이들의 생활을 돌보았지만 정작 자신은 여행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교제도 하지 않고 오로지 책을 저술하면서 서재와 학교 사이를 오가며 생활하다가 죽을 때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칸트가 이러한 말을 한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성실하고 보람 있게 살았는가를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표는 우리가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에 의한 얽매임에서도 자유로워지며 순간순간의 우상숭배도 버림으로써 진실로 그분의 형상을 입게 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나의 삶을 돌이켜 볼 때 실패와 실수도 했고 유혹을 극복 못하고 넘어진 때도 있었으며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인정받기보다는 간신히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아슬아슬한 인생길을 걸은 것 같다. 이러함에도 믿음으로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까지 온 것 같다.

세상에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순 없지만 항상 희망이 있는 죄인으로 살아왔기에 오늘도 주님 앞에서 통회하며 자복하는 심령의 자리에 앉아 있다. 특히 전도의 사명에 관해서 그렇다. 한 영혼을 위해 전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아예 어렵게 생각하고 접근하기를 망설이고는 한다. 남의 허물과 잘못은 잘 비방하지만 그 영혼에 대한 불쌍한 마음은 항상 잊어 버리고 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는 성경 말씀이 있듯이 전하는 자가 없이는 영혼 구원의 사명은 감당치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전도의 사명을 선교헌금으로 면책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직접적 전도를 게을리했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헌금은 물론 직접적 전도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매주 월요일을 택하여 전도하기를 시작했다.

독일의 신학자요 설교자인 본 회퍼는 히틀러 독재 정권 시절에 살면서 그의 독재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어느 날 그는 설교로 청중들에게 말하기를 “어느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몰고 전진하면서 많은 교통사고를 내며 달리고 있는 걸 기독교인인 당신이 목격했다면 부상자들을 치료만 해 주고 기도만 해 주겠는가? 아니면 그 미친 운전사를 차에서 끌어내겠는가?”라고 물었다 한다. 이 설교를 간접적으로 들은 히틀러는 이런 예언자적 설교자를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었다. 히틀러는 본 회퍼를 핍박하고 사형을 시켰다.

그 당시 본 회퍼가 죽기 전에 환상을 보고 남긴 일화가 전해졌는데 그 내용은 히틀러가 죽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실 때 “너 히틀러는 그동안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무고한 피를 많이 흘리게 했으니 지옥으로 가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한다. 이 때 히틀러는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하나님, 저는 사람이 죽으면 이러한 세계가 있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알았다면 저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다. 그리고 “누구도 저에게 이런 것을 알려 주지 않았고 전도하는 자도 없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히틀러를 비방했던 설교자 본 회퍼는 가슴을 치며 회개했다고 한다. “주님! 저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전도할 생각은 미처 못했습니다. 그를 권좌에서 끌어 내리려고만 했지 전도하려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라고.

시인 타고르는 ‘죽음의 신이 당신의 문을 두드릴 때 당신은 생명의 광주리 속에 무엇을 담아서 그 앞에 내놓을 것인가’라고 했다. 즉, 우리의 종말론적 삶은 오늘 죽어도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오늘 내가 죽는다 해도 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위해 살았고, 내가 사는 동안 이룬 것은 이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시며 가르치시고 우리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달려 고난받으시며 대속물로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조금도 낭비도 아낌도 없었고 몸소 다 내어 주신 실천하신 삶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칸트가 죽을 때 남긴 말처럼 “이제 그만하면 됐다.”라는 정도의 말은 남길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을 조금도 낭비 없이, 아낌없이 살아서 세상을 떠날 때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이 은혜를 통해 다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남은 생애를 긍정적으로 펼쳐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