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탐방| “기독교인의 문학 감상과 이해”_이종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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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화탐방>  

“기독교인의 문학 감상과 이해

윤동주와 워즈워스의 시를 중심으로

< 이종섭 목사, 찬미교회·시인·문학평론가 >

 

 

742-12(문화).jpg   한국인이 애송하는 시를 선정할 때 윤동주의 서시는 언제나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이것은 윤동주의 시가 상당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아가 기독교의 입장을 견지하는 독자나, 특히 평자일 경우에는 기독교성이라는 특별함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도 한다. 그래서 윤동주의 서시에 대한 평을 읽어 보면, 일반 평자와 기독교 평자의 입장이 다르다. 입장 자체가 다르다기보다는, 관점의 차이에서 나오는 방향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다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윤동주의 서시를 읽어 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전문

  

   보편적인 방향에서 살펴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기독교적 입장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평을 하는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이 첫 부분에서부터 해석의 틀을 완전히 정하고 들어간다. , ‘하늘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내용들도 그렇게 풀어 간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방식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첫째는, 과연 하늘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둘째는, 처음에 어떤 평자가 하늘을 하나님으로 해석했을 때, 왜 이후의 기독교 평자들은 하나같이 이 시각을 좇아가는가, 왜 다른 시각의 분석은 없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기독교적 입장에 서 있는 평자들은 신선함이나 실력이나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저 기독교라는 신앙의 순수함 앞에 평론의 새로운 시도가 죽는다는 생각이다. 서시를 기독교의 틀로 해석하는 것이 신앙이 될 수 없고, 서시를 절대 신앙을 떠나 해석한다고 해서 저촉될 것도 없다. 이 명제를 극복하고 이 틀을 깨는 것이 신앙인에게 절실하고, 또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동시에 인정한다.

   우선, 보편적 입장에서 살펴볼 때 서시에서 나타나는 하늘을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규정하면, 시의 내용이나 맛이 변하거나 떨어진다. 이렇게 할 경우, 시와 시인의 입장에서 하늘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별과 바람까지도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건 시를 죽이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어떤 방향이든 그것이 해악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어떤 작품을 반드시 기독교의 소유라고 증명하거나 확인해야 할 명분도 없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기독교 문학이 되거나 발전하는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서시를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평자들은 신학에 바탕을 둔 사유가 부족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통해 나타난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별계시와, 창조와 피조라는 일반계시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 기독교인은 이 두 가지가 다 우리 것이고, 자유로운 것이며, 어느 하나라도 잃어 버려서는 안 될 귀중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이런 사유는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중요한 문제를 등장시킨다. 그것은 일반적인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시인들이 자주 하는 말을 듣는다. 신앙적인 용어를 쓰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싶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정말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반계시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적용이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사고가 부족하면 기독교 시인은 많은 이론적 장애에 부딪쳐 좌초하거나 초보적인 시만 써내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다시 주제와 연결시켜 논의를 계속해 보자. 윤동주의 서시는 서시에서 표면적으로 보이듯이 특별계시 차원에서 쓰이지 않았고, 일반계시 차원에서 쓰였다. 이것은 서시를 이해할 때 일반계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서시에서 하늘을 지나치게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규정하지 말고, 그냥 시인 자신의 절대 고백과 결심의 배경 차원에서 나타나는 대상의 주체 정도로 인식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고, 서시 자체가 형태적으로 소품이며, 개인 고백적인 서술을 취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742-12(문화)2.jpg   기독교인들은 어떤 경우 참 어리석다. 세계가 하나님 것인데, 그것에 이름표를 달아야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성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와 존재》부터 다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서시를 그냥 서시답게 읽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읽어도 기독교의 시가 충분히 된다는 말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서시를 그렇게 읽어도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도움이 되는 텍스트로 삼아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라는 1차성과,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2차성에 대한 구별과 적용이 모호하고 그런 지식조차 없어서, 언제나 이런 오류에 빠지고, 진정한 자유를 잃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신앙의 이름으로 시를 오용하는 것은 번역시에서도 가끔 나타난다.

윌리엄 워즈워스(W. Wordsworth)의 〈My heart leaps up〉이라는 시를 보자.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 W. Wordsworth<My heart leaps up> 전문

  

   이 시에서도 보면, 어떤 기독교인들은 앞서 말한 계시의 두 가지 차원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기 때문에 너무도 뻔히 보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실수가 아니고 신앙이요 충성이라고 생각하며 흐뭇해 한다.

   마지막 행의 ‘by natural piety’가 바로 이것을 재는 바로미터다. 필자는 워즈워스의 무지개를 정말 좋아했었는데, 그것은 번역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처음으로 읽은 번역시는 그 부분을 천생의 경건한으로 번역을 했는데, 여기서 천생이라는 말이 문제다. natural이라는 단어를 천생으로 번역한 것일까? 이 문제를 이렇게 추측해 보며 해결을 시도해 볼 뿐이다. 이 번역자는 어쩌면 기독교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자신의 진심을 드러낸 것이고, 그 섣부른 진심이 문학의 눈을 가렸을지도 모른다고.

   자연을 보며 가슴이 뛰는 것이 문제인가? 기독교인들에게까지도 문제가 되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인데 그것을 바라보며 가슴이 뛰는 것이 과연 문제가 되는가?

종교개혁가 칼빈은 자연은 하나님을 보여 주는 눈부신 극장이라고 했다. 왜 기독교인들은 자연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기를 꺼려하는가. 왜 기독교인들은 자연을 바라보며 노래하기를 부담스러워 하는가. 혹시라도 유아적 신앙의 굴레에 스스로 속박되는 것은 아닌가.

   기독교 문학은 표현과 관련된 창작이나 해석에서 그 자체에 얽매이거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나아가, 기독교 문학이라면 소유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방향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문학의 확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불필요한 오류로 가는 것을 방지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 이종섭 목사는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바람의 구문론><물결무늬 손뼈 화석>등의 시집을 상재하였으며 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