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둥지에서 온 편지<11>| 세속정부와 신자의 길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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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정부와 신자의 길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우리의 신앙을 좁혀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와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즉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그분의 의지와 목적을 상기해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때와 기한을 변경하시고, 오만한 왕들의 피 묻은 홀을 부서뜨리시며, 용인할 수 없는 정부를 전복시키기에 통치자들은 이를 명심하고 두려워해야  

 

   늦가을의 정취를 더 느낄 사이도 없이 마음에 겨울이 먼저 온 것만 같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정부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혼란한 이 시기에 신자인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고유한 역할이 있음을 생각해본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신앙 수준이 사회적 책임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우리는 생각보다 실력없는 지도자, 실력없는 목사였다. 그러한 것에 비난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대를 개혁하고 삶을 개혁한다는 것은 주장이나 구호, 명분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의 변화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역사는 무엇이고 인생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인간에 대한 사정과 이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상황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하시려는 때까지 가야 한다. ‘차라리 죽여주십시오!’까지 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좁혀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와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즉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그분의 의지와 목적을 상기해야 한다.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 알아야

 

   이런 차원에서 세속정부와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면, 세상 통치는 근본적으로 교회 통치의 안녕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임명하신 것은 그리스도인 약자로 하여금 이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의 희생물이 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한 중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원칙적으로 집권자들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사자와 대표로 여겨서 존경해야 한다. 문제는 불의한 통치자에 대한 관계이다. 악한 집권자들이 우매나 나태 그리고 잔인성과 타락으로 가득한 행실 등등을 위선적인 위엄으로 은폐할 경우 그러한 행동들 자체는 결코 칭찬할 수 없다.

   하지만 집권자의 지위 그 자체는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여전히 영예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중심으로 따르는 사람으로서는 그들의 포고에 순종하거나 세금을 내거나 공직과 국가방위 의무를 갖거나 그밖에 명령들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실증해야 한다.

   통치권자들을 향한 복종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복종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복종하게 하려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까지도 명령하셨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여기에는 시민이 공중 앞에서 지켜야 하는 자제심으로서의 복종도 포함된다. 개개인 시민은 공적인 일에 간섭하여 공연히 집권자의 직무를 침범하거나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말아야하거니와 하물며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통치자에게 순종해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연히 유의해야 할 일에 등한하며, 공적직무 수행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저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불의한 통치자들이 이전에도 존재해왔었다. 그들에게서는 선행하는 자를 표창하며 행악자를 벌하기 위해서 임명된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집권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할 때, 이러한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하고 악하고를 떠나서 한결같이 거룩한 위엄을 지닌 합법적인 권력을 주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불의하고 무능한 지배자들로 말미암아 백성이 어려움을 겪을 경우, 그들을 타도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백성의 사악을 벌하시기 위해서 세우신 하나님의 심판 도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악한 통치자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리시는 진노의 도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악한 지배자에게까지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보편적인 상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쉽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중에 우리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그 누구는 이해가 되겠는가! 하나님은 섭리로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라들을 배치하고 대통령이나 수상들을 임명하는 분이시다.

   여호와는 당신의 뜻에 따라 때와 기한을 변경하시고, 당신의 뜻에 따라 왕들을 세우시고 폐하는 분이시다. 실례를 들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방인 침략자 느부갓네살 왕도 실상은 악하여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각 나라의 왕들은 율법을 통해서 모든 자제와 근신하는 훈련을 받아야 했으므로, 당연히 왕의 입장에서 마치 권리처럼 이런 일들을 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권리라고 했는데, 이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왕에게 복종해야 하되, 항거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왕을 통해 심판하시기도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를 통해서 보듯이 악한 왕에게 복종하라는 성경의 실례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특이한 경험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가 통치자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이런 원리 때문에, 비록 포로로 잡혀간 입장이었지만 그러한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이 평안하기 위해서는 바벨론 왕을 위해서 기도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를 평생 좇아 다니면서 죽이려고 했던 사울이었지만 그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두 번이나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죽이지 않았다. 우리 역시 통치자들로부터 부당히 학대당하고, 억울한 착취를 당하며, 공연히 모욕을 받고, 애매히 괴로움을 당한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와 명령을 생각함으로써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어떤 비행이 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주님께서 주시는 채찍의 일원으로 징계를 받는 것이라고 자각하면서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정이나 힘들고 정신적 후유증도 있고 억울한 경우에는 직접 나서서 시정하려 하지 말고, 모든 권력의 주인이신 주님께 도움을 간청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반드시 정의가 살아나게 될 것이다.

   불의한 법을 제정해서 빈민을 불공평하게 재판하거나 미천한 사람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과부에게서 토색하며,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모두 반드시 여호와의 멸망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만사 공명정대한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과 섭리가 뜻밖의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느 때나 공명정대하셔

 

   가령, 예기치 않은 복수자를 일으켜 악한 정부를 처벌하고 압박받는 백성을 구출하실 때가 있다. 자기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하시려고 모세를 일으키셨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다른 의도로 노력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인도하셔서 이 목적을 달성하신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행위가 어떻게 판단되던 간에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일을 성취하셔서 오만한 왕들의 피 묻은 홀을 부서뜨리시며, 용인할 수 없는 정부를 전복시키신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은 깨달아야 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집권자들의 권위를 멸시하거나 침범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한다. 난폭한 독재를 시정하며 처벌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권한이다.

   어느 나라든간에 통치자들의 전횡을 억제할 목적으로 임명된 국민의 관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옛적 스파르타의 왕들에 대립한 감독관들이 그렇고, 로마 집정관들에 대립한 호민관들이 그러하고, 아테네의 원로원에 대립한 지방장관들이 그렇고, 현재 각국의 국회가 중요 회의를 열 때에 행사하는 권한 같은 것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이런 위치의 사람들은 통치자들의 방종한 횡포에 맞서 자신의 직책을 적극 행사하여 항거하여야 한다. 만일 그들이 군주들의 폭정을 못 본 채 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자로 임명되었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의 자유를 배반하는 것이므로, 엄연한 직무유기와 위선을 자행한 극악한 배신행위가 된다.

   물론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도 항거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통치자들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당위성에는 한 가지 예외가 있으니, 곧 주안에서만 복종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는 일이라면, 제 아무리 권세가 당당한 통치자 앞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고난을 받더라도 굳세게 항거할 수 있어야 한다.

   왕은 항거하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왕이었던 솔로몬은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왕의 진노는 살육의 사자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하늘의 사자인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선포한다. 오직 주안에서만 복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통치자에게는 항거해야

 

   우리는 통치자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경건을 버리기보다는 주님께 복종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얻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았고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그러므로 누구의 종이 되어야 하겠는가? 통치자의 종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가? 성도는 악한 통치자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종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그들의 불경건한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한 바울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한다. 하지만 서로 대립되거나 반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두 정부, 특히 세속 정부에도 그들이 ‘주 안에서 요구하는 것’인한 아낌없이 복종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나가는 것을 통하여 두 정부는 하나님의 섭리중에 합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는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전의 안정되고 고요하고 평안한 삶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다시 한 번 깨달으며 국가와 사회와 교회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며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