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특집| (2) 국가에 대한 교회의 태도_노승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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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한 교회의 태도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민주국가는 헌법을 통해 대통령과 정부에 주권의 일부를 맡기고 대통령으로 하여금 법률에 따라 다스릴 것을 요청한 것” 

”대통령은 헌법과 그 질서를 수호할 책임이 있고 그 권위 아래 있어야 하며, 법질서를 허물었을 때에는 그 책임을 물어야”

 

   장로교 목사인 사무엘 러더포드는 1644년에는 대영제국에 돌풍을 일으킨 책 한 권을 저술했다. 그것은 “법이 왕”(Lex Rex)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왕도 법질서 아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서구의 근대적 국가 개념, 곧 사회계약론은 바로 이 러더포드의 저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국민은 자신의 주권을 나라에 위탁하고 나라로부터 보호를 받는 관계로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정의한 것이다. 이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언약 관계로 정의한 것이다. 스코틀랜드가 장로교 체제에서 언약국가를 표방하는데 이도 같은 맥락이다.

   1천 자 내외로 된 국가 언약서(National Covenant)가 1580년에 작성되고 엄숙 동맹 언약서(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가 1643년 스코틀랜드 총회와 잉글랜드 하원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공동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러더포드의 “법이 왕”이라는 책은 바로 이즈음에 저술되었다.

 

근대적 국가 개념은 사회계약론에 기초하고 있어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가 권위의 출발점은 바로 언약이다. 그리고 이 언약의 문서가 곧 법률이며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법률은 곧 성경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최종 권위가 성경이듯이 국가에서 최종권위 역시 국가의 헌법인 셈이다.

   이 관점을 더 극명하게 드러낸 인물도 있는데 네덜란드의 루이 알투시우스는 “정치학”(Politica)에서 독재자는 폐위되어야 하며 심지어 사형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 민주국가인 대한민국 역시 헌법을 통해서 대통령과 정부에 우리 주권의 일부를 맡기고 대통령으로 하여금 법률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왕정에 살지 않는다. 17세기 청교도들의 관점에서 왕도 법질서 아래 있어야 한다면,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은 당연히 헌법과 그 질서를 수호할 책임이 있고 그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 법 위에 대통령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해가 우리에게 자명하게 가져야 할 관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대통령도 법률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질 수 없고 어떤 교회의 지도자라도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대통령이나 교회의 지도자가 법질서를 허물었다면 당연히 그 법질서를 허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언약이란 정의를 기반으로 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국가의 관료들에게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은 이들이 정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하는 권면을 살펴보면,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3-4)라고 말한다.

   즉, 국가 관료의 사명이 악을 응징하고 선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전제 조건하에서 국가 관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정초해야 한다.

 

국가 관료들의 사명은 악을 응징하고 선을 보호하는 것

 

   우리가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우리가 맡긴 주권을 수호할 때이지 그 주권으로 사익을 추구하고 최씨 일가와 대통령의 배를 부르게 할 목적으로 맡긴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런 반-법률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국가 관료에 통치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교회의 보수적 태도들이 국가 권력의 부패를 부추겼다. 과거 군사독재정부 시절의 조찬기도회는 최태민에 의한 구국기도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는 바알숭배나 진배가 없다.

   그럼에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의 교훈을 빌미로 대통령을 위로하며 대통령이 듣기 좋은 말을 하기에 급급하고 실제로 대통령은 그런 교계 지도자들만 만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기총은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놓고 있다. 한기총의 이런 행보는 결코 참된 교회의 입장일 수 없다.

   우리가 국가와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지점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선물로서 공의를 대변하도록 하기 위함이지 불의와 불공평을 대변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정의할 때, “관원의 도움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sanctum esse Dei donum auxilium magistratus)로 이해해야 한다. 이유는 신자의 신앙생활의 안정과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하는 기구로써 국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고 보존할 책임 가지고 있어

 

   교회가 국가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교회를 위한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가 국가를 위하는 지점이 있다면 관원들이 정의구현을 위한 선지자적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당연히 구약에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언급되는 공평과 정의를 실행하는 정부여야 하고 신자는 이 기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위정자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의 기능을 상실하고 악과 불의를 조장한다면 교회는 민주국가의 시민으로서 응당 이런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