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부작(述而不作)_이동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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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부작(述而不作)

<이동만 목사, 대구 약수교회>

거짓 선지자들은 계시를 청중들의 기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선포해

 

 

과거에 존재했던 위대한 유산을 기술(記述)할 뿐 새로 창작하지 않는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은 논어 술이편 1장에 나온다. 술(述)은 옛 것을 풀이하다, 작(作)은 새로운 것을 지어 만들다의 뜻이다.

사상가요, 교육자로서의 공자는 많은 현명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는 했으나 독창적인 사상을, 독립된 저작으로 짓지는 않았는데 위의 말은 이를 토로한 것이다.

이 말을 보면서 설교하는 사람도 술이부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교자에게는 성경(위대한 유산)이 주어져 있으므로, 성경을 기술할 뿐(전달할 뿐) 창작하지 않는다(설교자 자신의 말을 하지 않는다). 감히 설교자가 창작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성경을 만드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지만 성경을 풀이(해석)함에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이런 우를 범할 수 있다.

설교자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맥을 무시하면 한 구절의 성경 말씀으로 별 희한한 내용을 만들어 전할 수 있다.

김정운 박사는 <에디톨로지>라는 책에서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 창조는 편집이다”라는 말을 했다. ‘에디톨로지’(Editology)라는 말은 영어 사전에도 없는 말인데 ‘편집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현대에는 많은 자료들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 낸 책이름이다.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편집하면 창작은 될 수 있을지언정 바른 설교는 될 수 없다. 설교가 창작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어디까지나 성경의 본의(本義)를 잘 들어내기 위한 기술적인 면에서만 가능하다.

윌리엄 A. 반게메렌은 <예언서 연구>에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를 일곱 가지로 대조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선포하지만,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택적으로 선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위안을 주는 주제들만 선택하여 선포하고, 하나님의 경고와 위협들은 선포하지도 적용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참 설교자와 거짓 설교자의 차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명기 28장을 흔히 ‘축복의 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1-14절까지만 해당된다. 15절 이하는 ‘저주의 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 설교는 14절까지만 하는 것 같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 하는데 1-35절상까지는 믿음의 결과로 신나는 일이 일어났지만, 35절하부터는 결코 신날 수 없는 일들이 믿음의 결과로 일어난다. 앞부분까지만 설교하고 만다면 참 설교자라 할 수 없다. 참 설교자는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설교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 성도의 무기력은 복과 고난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복음에 고난을 빼면 참 복음이 될 수 없다. 회중이 고난을 듣기 싫어한다고 설교에서 뺄 수 없다. 어느 설교의 성분을 분석해 보면- 자기 계발 51%, 만담 19%, 상담 15%, 심리 12%, 성경 3%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에 합신 교수들과 경북노회 목사들이 경주에서 모임을 갖고 보문단지 옆에 있는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보통 식당에 가면 ‘손님은 왕이다’라는 표어를 쓴 액자가 걸려 있는데 그 식당에는 ‘손님은 신(神)이다’라는 큰 액자가 붙어 있었다. 한 교수가 “당신에게 신이다”라고 한다고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다고 해서 주위를 웃게 만들었다.

설교자가 설교를 듣는 회중을 왕으로 여겨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때로는 회중은 참 하나님의 말씀에 기갈(飢渴)이 들어 있는데 설교자만 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회중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설교자로 부름 받은 자는 모름지기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성경을 우리의 선이해(先理解)를 가지고 해석할 때 곡해하기가 쉽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으로 바깥에 있는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있는 말과 성경에 있는 말의 다름과 같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복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그려 볼 때 떠오르는 것과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다르다면 회중이 오해할 수 있으므로 그 차이를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합신의 한 교수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될 때 기복적인 생각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목회자는 성경 말씀을 잘 가르쳐서 참 믿음과 복을 깨닫게 주어야 한다. 그런데 목회자가 도리어 기복을 조장하거나 심화시키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사역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