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꽃_정요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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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꽃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늙을 때 유일하게 남는 것이 무엇일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10여 년 전에 읽은 박완서의 “마른 꽃”을 한 달 전에 다시 읽었다.

자식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몇 해 전에 남편을 잃은 주인공 여자는 대구에서 열리는 조카의 결혼식에 참여하였다. 막차의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하며 우연히 옆에 앉은 노신사와 연정(戀情)이 생겼다.

내년이면 환갑이 되는 그녀였지만 그 남자 앞에서 열여섯 살 먹은 계집애처럼 깡총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그 나이에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누가 믿을까! 그녀는 그녀가 얼마나 수다스럽고, 명랑하고, 박식하고, 재기가 넘치는 사람인가를 처음 알았고 만족감을 느꼈다.

자식들이 둘의 연정을 바라보며 처음에는 바람난 딸을 훈계하듯 대했지만, 그 남자가 교수로 은퇴하여 적당한 재산이 있다는 것과 자식들도 자리 잡고 잘 산다는 정보를 들으며 재혼을 부추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남자를 인해 들뜨고 행복한 마음, 자식들의 전폭적인 협조 그리고 그 남자의 열렬한 구애가 있음에도 재혼을 단념하였다. 이유는 조 박사와의 연애감정은 젊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정욕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서로 충족되는 연애는 겉멋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욕으로 눈이 가리지 않으니 상대방의 늙음과 허물이 빤히 보였다. 박완서는 그 느낌을 아래처럼 수려하게 잘 묘사하였다.

“아무리 멋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닥칠 늙음의 속성들이 그렇게 투명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내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드러날 기름기 없이 처진 속살과 거기서 우수수 떨굴 비듬, 태산준령을 넘는 것처럼 버겁고 자지러지는 코곪, 아무 데나 함부로 터는 담뱃재, 카악 기를 쓰듯이 목을 빼고 끌어올린 진한 가래, 일부러 엉덩이를 들고 뀌는 줄방귀, 제아무리 거드름을 피워봤댔자 위액 냄새만 나는 트림, 제 입밖에 모르는 게걸스러운 식욕,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 된 끝없는 잔소리, 백 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인색함, 그런 것들이 너무도 빤히 보였다.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는 것은 사랑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면 안 되리라. 겉멋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재고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불가능을 꿈꿀 나이는 더군다나 아니었다.”

박완서는 64세가 되는 1995년에 이 소설을 썼다. 그 나이가 되면 정서보다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아는 나이이리라. 50 중반에 접어든 나도 예전에는 어떤 이가 게걸스럽게 먹으면 식탐이라고 탓했지만 이제는 건강한 식성으로 보여진다. 

약 20년 전 남서울노회에 처음 왔을 때에 선배 목사님들이 참 잘 드셨다. 익지 않은 고기까지 서로 먼저 드실 정도라, 고기는 “허락”을 받은 후에 먹어야 한다고 유머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60대의 그분들이 드시지 않는다. 모이면 건강과 은퇴와 손자 이야기를 하신다. 연륜과 부드러움이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도전과 패기가 사라진 초로의 슬픔과 스러지는 비장미는 어쩔 수 없다.

나는 십년 넘게 노인요양센터의 원목으로 있다. 노인이 마지막으로 먹는 것이 두유이다. 그 두유마저 못 마시면 이제 죽음이 가까이 있는 것이다. 두유를 겨우 마시며 눈꺼풀도 움직이기도 힘든 노인에게 어떤 정욕이 있을까? 그 상황에 닥치면 어떤 말이 가장 정확하게 와 닿을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고,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을 뿐이다.

나는 찬송가를 부르거나 성경을 읽을 때 간혹 그 아름다운 정욕도 지나가고 두유만 겨우 먹는 나의 늙음의 때를 생각한다. 늙을 때 유일하게 남는 것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찬송가의 가사이고 성경 말씀이다.

인생을 살 때에 다른 잔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고 오직 그 말씀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영원 속에서 살아남는 그 말씀만이 옳은 것이다. 그러면 종종 눈가가 적셔온다. 

신자는 “영원”이 있기에 “마른 꽃의 때”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정욕이 줄어들며 비로소 하나님을, 영원을 깊이 깨닫는 것이다.

영원을 존재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