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현필의 북카페| 주일성수보다 더 시급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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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주일 | 저자 김남준 | 익투스 | p190

주일성수보다 더 시급한 것

< 민현필 목사, 새순교회 부목사 >

오늘날 주일 성수 문제는 사실 실패한 주일예배로부터 비롯된 것

 

 

어릴적부터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사람들치고 주일날 부모님과 교회 가는 문제로 다퉈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 하필 방송사들은 유년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맞춰서 만화영화를 방영해야만 했던 것일까?

한 번은 주일학교 선생님이 교회에서 제법 떨어져 있단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교회 가자고 호통을 치셨던 기억이 난다. 집사님 아들이 그러면 되냐는 반협박성 멘트와 함께 말이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사회적 위신까지 챙겨가면서 억지로 교회 출석하는 일은 보통의 결단과 인내심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현장의 사역자들이나 주일학교를 섬겨본 경험이 있는 성도들이라면 필자와 같은 청소년 시절을 지나는 자녀들을 무수히 많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청소년들이 부모의 바람처럼 ‘예배의 자리’로, ‘주일성수’하는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님을 가슴 아프게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회적 맥락 속에서 ‘주일성수’를 아예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모든 날이 주의 날이며 일상의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는 식의 섣부른 일반화 내지는 방종주의적인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은 몹시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충분히 살피면서 저자인 김남준 목사는 우리를 잠시 오래된 ‘옛적 길’로 안내한다.

그는 ‘주일성수’와 관련하여 두 가지 논점을 제기한다. 첫째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의 역사적 정당성, 그리고 둘째는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의 연속성에 관해서이다.

그에 의하면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모여 기념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로마와 황제숭배와 타협한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오히려 그것은 ‘선교적 정황화’(contextualization)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날 주일성수 개념이 약화된 것은 다름 아닌 ‘부활의 의미가 교회 안에서 퇴색되고’ 있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또, 루터의 경우, 중세의 유대교 개종자들이 범한 안식일주의의 과오를 피하고, 천주교회가 제정한 지나치게 많은 성일들의 준수로 인해 오히려 ‘피폐해진’ 대중들을 삶을 회복하기 원했기 때문에 구약 시대의 의식법 으로서의 ‘안식일 제도’는 신약 시대에 와서는 ‘폐지되었음’을 강조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영속적인 의미까지 부인한 것은 아니지만.

반면, 칼빈의 경우는 안식일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입장이었지만, 그것의 의미를 ‘주일에 투영하여 주일을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안식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며, 이날을 지킴으로써 신자는 전 생애에 걸쳐 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주일성수에 대한 청교도들의 엄숙주의 전통을 분석하면서, 그러한 전통이 세워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맥락에 깊은 공감적 태도를 취한다. 즉, 제임스 1세 등과 같은 이들에 의한 외부적인 박해의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이 주일성수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거의 배교와 다름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또, 청교도들은 좀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주일성수‘ 신학을 전개했는데, 주일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치기 위해 제정된 날만이 아니라 6일 창조와 7일째날의 안식 패턴에서 보듯이 ’자연법‘적인 근거를 갖고 있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교회사적 고찰을 토대로 한국교회의 상황을 점검한다. 그에 의하면, 한국교회 성도들은 ’주일성수‘를 미신적인 ’치성‘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심성과 율법주의적 경향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현장의 목회자들이나 교회학교 교사들이 어떻게 하면 다시금 주일성수의 당위성과 신학적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양심의 자유‘를 보전하고, 중세적 율법주의 전통으로 약간 회귀(김남준)한 듯 보이는 ’청교도적 엄숙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책의 5장은 이에 대한 저자의 목회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제안이 담겨 있다.

그에 의하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명시된 주일성수를 위한 가르침들을 뛰어넘는 우리 시대만의 신앙고백 전통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안에 현대인들의 환경과 생활 패턴에 부합하는 주일성수 지침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각자의 양심의 자유 속에서 스스로를 위한 지침이 먼저 되어야 하며, 그것을 외적으로 공표하거나, 타인을 강제하고 판단할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주일성수라는 주제가 신학의 다양한 분과와 영역들을 포괄하는 응집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바른 교리 교육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뼈아프게 다가온 부분은, 오늘날 주일 성수 문제가 사실은 실패한 주일예배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것은 ‘잠든 강단의 설교’와 ‘영적으로 잠든 교회’로부터 비롯된 문제라고 지적한 부분이다. 필자도 이 부분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주일 예배가 만화영화나 연속극보다 더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줄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문화보다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영광을 맛보고 경험하는 장소가 된다면… 결국 주일성수와 관련된 모든 논쟁의 핵심이자 동시에 그 결론은 그것을 등한시하는 ‘젊은 세대’라는 표면적 문제 이전에 그것을 가르치고 전수해야 할 교회 전체의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자’는 저자의 주장이 결코 논점 일탈일 수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