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경제관에 관한 소고_최재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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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경제관에 관한 소고

< 최재호 집사, 실로암교회 >

 

거듭난 신자에게 있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삶의 원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접하게 되는 모든 상황들, 특히 직업을 통한 노동과 더 넓게 경제행위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욕심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진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포기할 것을 명하신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님을 가르치신다.

성경말씀은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곧 내가 임의대로 처분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고전 4:7). 그러므로 신자는 그것을 가지고 결코 교만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이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칼빈은 명확히 인식했다(강요, 3.7.4).

 

  1.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

 

칼빈은 부를 하나님의 은사에 의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만일 누군가가 부자가 된다면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열매이다. 하나님께서 복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실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칼빈, 신명기 8:17).

모든 것이 선하신 아버지이신 주께로부터 왔음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신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손에 받아 쥔 물질을 사용할 때 그것을 창조하시고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신 이의 목적을 생각하며,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음식이라면,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신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함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을 주셨음을 감사하며 음식을 대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시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기억하며 음식을 섭취하여야 한다.

만약 그것이 의복이라면, 몸을 보호하거나 인간다운 품위를 갖추도록 하는 필수적인 목적은 물론 아름다움과 정숙함을 충족시키도록 선하신 아버지께서 공급해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재화(財貨)는 그것이 가지는 필수적인 용도를 충족시키는 물론, 그것을 즐기도록 주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해야함을 가르친다(강요, 3.10.2). 그러므로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로 필수적 용도만을 인정하고 나머지 용도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는 빵과 물만으로 가능하지만 더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주까지 주셔서 기쁨과 즐거움, 활력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과거 중세 수도원이나 사막수도자들 중에는 평생을 빵과 물로만 연명하며 세상을 떠나 동굴과 사막, 심지어 높은 장대 위에서 자신을 괴롭게 하며 살아간 이들도 있었다. 반대로 구원받은 신자는 세상의 여러 가지 육적, 물질적 상황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방탕한 입장도 있었다. 칼빈은 그러한 양 극단적 태도를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불신자의 물질적 풍요나 부는 그를 더 세상의 즐거움으로 빠져들게 하는 화(禍)가 되고 말 것이다. 또 물질적 풍부나 결핍 자체가 신자의 신앙의 좋고 나쁨과 결부할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시기도, 거두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욥 1:21).

 

  1. ()-교회와 이웃을 위해 위탁(委託)

 

나아가 성경은 신자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와 이웃을 위해 신자들에게 ‘위탁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자주 청지기를 등장시킨다. 포도원지기의 청지기(마20:8), 지혜있고 신실한 청지기(눅12:42) 달란트비유(마25:15이하), 불의한 청지기(눅16장) 등 이는 우리에게 맡기신 주인, 위탁하신 이를 기억하게 한다. 그러므로 주인이신 하나님의 청지기가 된 신자들은 내게 맡겨두신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를 늘 기억하여야 한다.

교회 안에 각양 은사를 나누어 주신 것은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온전케 하며(엡 4:11-12), 또 교회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균등케 하는 원리’가 적용된다(고후 8:14-15). 물론 교회 밖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장수민, 존 칼빈, 498).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각인에게 주신(위탁하신) 모든 것, 이를테면 직분을 비롯하여 물질, 재능, 지식, 건강, 기회, 권력 등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교회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시는 만유(萬有)의 주인께서 위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주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점유(占有) 혹은 보관하고 있다고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다.

덧붙여 칼빈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사(재능, 물질, 명예, 지식 등)를 볼 때, 시기하거나 멸시해서는 안되며, 극히 존중하고 귀히 여기라고 가르친다. 그 모든 것은 선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분명히 하였던 그에게 있어서 물질은 ‘소유(所有)’나 ‘획득(獲得)’의 개념이 아니라 ‘분배(分配)’의 개념이었다.

칼빈은 우리가 재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면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변에 두셨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상속에 의한 것이든, 근면과 노력에 의해 획득한 것이든, 여하간 부를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지나친 무절제로 낭비해서는 안 되며, 형제들의 가난을 줄이는데 사용하라고(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칼빈, 고린도후서 8:15).

사실 물질의 부요함이나 궁핍함이 본질상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부유한 자들이 자기들의 부에 짓눌려 세상의 안락을 즐기며 사느라 자신들의 본분을 버리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거기에서 부자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그릇된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위탁받은 물질을 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칼빈은 신자에게 하늘의 영생(영원한 구원의 복락과 악인의 심판)을 묵상하는 일을 권한다. 그러면서 그는 물질을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며, 빈곤을 조용히 참고 견디며 부유함을 억제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다(강요, 3.10.4). 

정리하자면, 부(富)는 우리의 형제들을 돕는데 사용하라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장수민, 존 칼빈, 2. 18.). 그래서 칼빈은 부자들의 자선행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을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부자들의 마땅한 의무이므로 정성을 다하라고 했다.

좀 더 나아가 그는 부자가 빈자를 돌아보고 돕는 것은 바로 ‘자신의 신자됨을 확인하는 은혜’라고도 생각했다. 부자의 선한 행위 그 자체나 공로가 아니라, 물질을 대하는 그의 자세를 통해 선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섬기며 순종하는 신자인 증거가 그렇게 나타나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배워야 할 분명한 원칙이다.

나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선하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주어진 것이기에 반드시 주신 분의 목적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성경은 위탁물이 제대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결산의 때가 있다는 것도 명백히 가르친다. 이를테면 ‘주인의 무서운 경고가 뒤따르는 위탁’인 셈이다.

 

  1. (), 어떻게 얻고 관리(사용)할까

 

성경은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기회를 따라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며 부를 얻고, 그것을 잘 관리하고 사용하라는 권면을 준다. 두 곳의 성경본문을 살펴보자.

데살로니가전서 4:11-12에는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에베소서 4:28에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정당한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과 그것이 불신자들에게도 교훈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이해를 준다. 또 직업 활동을 건전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행하여 빈궁한 자, 혹은 필요한 자를 도울 수 있도록 경제활동에 힘쓰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칼빈 역시 이 본문의 가르침을 ‘한가롭고 침착하게 자신의 일을 하라’와 ‘자신의 소명의 여러 임무에 몰두하고 헌신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그리고 두 가지 조언하기를 먼저는 각자가 생계를 유지할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고 둘째는 불신자들 앞에서도 존경받는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칼빈, 데살로니가전서 4:11-12).

또 그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는 부정한 방법을 버리고 합법적으로 남을 해치지 않는 수고를 하여 자기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고 남에게 그것을 적절하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라’고 해석한다. 즉 정직한 노력을 통한 경제생활을 할 것과 다른 사람의 필요를 공급해줄 수 있도록 힘써 부를 모을 것을 권하는 것이다(칼빈, 에베소서 4:28).

이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제8계명을 해설하면서 남의 돈이나 재산을 폭력과 속임수로 도적질해서는 안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서로를 위해 지불해야 할 봉사의 의무를 거절하는 것도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며 그 범위를 확장해 정의하고 있다(강요, 2.8.45).

또 칼빈은 신자가 부를 획득하는 방식은 정당한 방법으로, 성실한 노동행위를 통해야만 하며 지나치게 높은 이자놀이나 투기와 같이 불로소득(不勞所得)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견해를 밝힌다(임종구, 칼빈의 제네바목사회, 480).

정리하자면, 칼빈은 열심히 수고하되 정당한 방법으로 사회의 유익을 위한 직업을 가질 것과 그러한 경제활동을 통해 부를 쌓을 것, 자신도 부를 누리되 이웃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애쓸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와 지체, 그리고 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신자들의 의무를 생각해보면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칼빈 선생이 신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가 우선적으로 부여된다고 생각하여,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고하고 노동하는 것이 경건생활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노동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이므로 농부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데도 밭(자신의 생산기반으로서)을 팔아버린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통해 우리가 먼저 가족을 부양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무엇인가를 나눠줄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부스마, 칼빈, 458).

 

  1. 신자의 직업으로서 소명 이해

 

신자는 어떤 직업, 어떤 노동을 하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직업을 가지게 되고 그 일을 통해 교회와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게 된다. 이때 붙잡아야 할 한 가지 원리는, 우리가 가진 직업과 그에 따른 노동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사탄의 일이 아닌 한 마음에 복음의 지배를 받으면 그의 모든 활동은 경건한 것이란 점이다. 여기에서 이른바 ‘직업소명설’이 나타난다. 모든 사람은 그 일을 통해, 혹은 그 일의 자리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신앙을 포괄하는 교리(敎理)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거기서 구원이 시작되고 마음속에 들어가 일상생활에 전해지며, 그로 인해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강요, 3.6.4). 즉 그에게 있어 교리는 삶의 열매로 연결되는 개념이다.

직업과 노동은 바로 신자가 자신의 교리를 삶의 열매로 자리잡게 하는 현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직업은 하나님과 교회,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큰 틀에서 자신의 신앙의 도리를 삶의 열매로 체화하는데 적합하다면 어떤 것이라도 경건의 자리인 셈이다. 

칼빈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들을 사회적 관점으로까지 확대했다. 그의 고린도후서 8장 15절 주석에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것의 근원이 무엇이든 ‘만나’(manna)와 같다. 우리의 장래를 위해 지나치게 쌓아두며, 우리의 가련한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으로 부를 축적해서는 안 된다.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완전히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굶주리는 사람이 없고 남을 희생시키면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평등은 지켜져야 한다”며 사회 구조문제를 논한다. 이 말은 우리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더하여 그는 하늘로부터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부자는 절제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실족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인 셈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상대적 가난 혹은 빈곤이다. 부가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빈곤도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 혹은 심판과 동일하지 않다. 칼빈도 가난(빈곤)을 반드시 불행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난이 우리를 경건하게 한다면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가난에 처한 자는 과도한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 받지 말고, 인내하며 견딜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극심한 가난 중에도 검소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일에 몰두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전했다.

부요한 가운데 하늘의 소망을 깊이 묵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잘 사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가난 가운데 인내하며 일용할 양식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며 자신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가난과 질병, 가족들과의 영원한 이별 등은 결코 반길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신뢰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익을 위해 특별한 의도 중에 주신 것이란 것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생각은 <기독교강요>를 통해서도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신자는 부귀(富貴)에 있어서 자신의 생각과 바람이 현실과 다르다 해도 결코 조급하거나 비관해서는 안 된다. 빈부와 귀천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분배하시는 것이며 신자의 구원에 가장 유익한 방식으로 이뤄가시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강요, 3.7.9).

그러나 이같은 원리를 우리가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그러한 삶을 당연히 살아간다거나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옛 본성과 끊임없이 싸워가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켜나가는 처절한 싸움에 의해 조금씩 쟁취(爭取)될 뿐이다. 이 싸움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고, 막연히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마무리 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해 끝없이 욕심내는 우리의 안타까운 상황도 한순간에 종료될 수 없다.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정(情)과 욕심을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천상에 연결된 영원한 복락에 대한 갈급한 소망이, 이 땅의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들에 대한 욕망과 비교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인식해감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힘겹게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또 살아가야 할 인간들에게 칼빈 선생의 권면을 한번 더 새겨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칼빈은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관계없는 번영(繁榮)을 동경하거나 바라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참된 안정과 안식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

둘째로, 이 땅에서 악인들도 명예와 부귀를 누리지만 결국 그것들은 불행을 초래하기에 그들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실족하지 말 것을 명한다. 그들에게는 참 행복이 없으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고 인도하심을 따르며 주께서 베푸시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지, 부귀영화를 동경하거나 자신의 재주나 부지런함을 의지하거나 헛된 행운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한다.

끝으로 바라는 만큼 일이 되지 않아도 조급하거나 비관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께 불평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강요, 3.7.8).

 

맺는말

 

물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칼빈의 이해를 중심으로 신자의 경제관념에 대해 살펴보았다.

거듭난 신자도 사실상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기에, 세상의 반(反) 그리스도적 문화와 가치에 영향을 받으면서 이 땅의 악한 존재들로부터 끊임없는 유혹과 그에 따른 고통을 당한다. 그런 중에 삼위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회복된 위치와 존재를 자각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결단이나 노력이 아닌,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함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해석하며 살아갈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도 세상의 경제논리와 구조를 벗어나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당연히 경제행위를 통해 세상의 재화나 용역을 생산, 소비, 분배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다만 신자는 세상의 가치나 시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하여 말씀이 제시하는 가르침에 따라 해석하며 거기에 겸손히 순종할 뿐이다. 

신자들은 이 땅을 살아가며 선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된다. 하늘 아버지는 신자된 우리에게 영의 양식과 함께, 이 땅을 살아갈 모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다. 모든 사람이 하늘로부터 오는 은택(恩澤)을 입고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이는 오직 선택된 자들로 제한된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이 선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를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그러한 고백과 조화되는 삶을 산다. 이는 창조주이시자 섭리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맡겨진 물질을 교회와 지체들, 그리고 필요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려 애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영원한 천상을 소망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갈 이 땅이 아닌, 영원한 천상을 소망하고 묵상하며 우리의 욕심과 자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한 신자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이나 노동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명확하다.

하나님의 법과 상충되지 않으면서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아닌 한, 아니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 자리가 자신의 신앙교리를 열매로 체화(體化)시키는 부르심의 자리인 것이다. 이러한 직업을 통한 노동행위를 통해 교회를 세워가고 지체들을 돌보며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다. 물론, 신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가정과 가족들을 돌보는 것은 가장 우선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 신자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며 모든 일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결산이 뒤따른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