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상(獻上)에 대하여_최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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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상(獻上)에 대하여

< 최덕수 목사, 현산교회 >

 

자신이 드리는 헌금에 어느 정도 무게 느낄 만큼 하나님께 드려야

 

 

교회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믿는 신자들까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헌상(獻上)에 대하여 잘 가르치지 않게 되었다. 

신자들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가 자신들을 신사적으로 대우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헌금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는 교회를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일이 일시적으로는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 주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권리는 앞세우지만 헌신은 잘 하지 않으려는 기형적인 신자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고린도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에게 구제 헌금을 보내는 것을 가리켜 “은혜”(고전 16:3)라고 표현하였다. 성경은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은혜”라고 말하지만,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나눠주는 신자의 구제 헌금도 “은혜”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헌상은 성도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은혜를 누리게 하고 나누게 하는 통로라 할 수 있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교회가 헌상에 대해 가르치는 일이나 성도들이 헌상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일을 결코 부담스러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지만 헌금한 이들의 이름을 주보에 올리고 헌상기도를 할 때 거명까지 하는 유치함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교회들도 있지만, ‘우리 교회는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성도들로 하여금 유약한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교회들도 있다. 헌금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말이다.

구약시대 때 제사를 드림에 있어 제물은 필수적이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처음 난 동물이나 처음 난 농산물을 바쳐야만 하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도 빈손으로 오면 안 되고 비둘기라도 바쳐야만 하였다. 물론 제사제도가 가리켰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오늘날에는 구약 시대와 똑같은 방법으로 드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동일하게 견지해야 할 원칙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예배할 때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창 4:2-5; 히 13:15-16).

그러므로 새 언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한다. 물론 그 방법은 새 언약의 시대에 합당한 방법이라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이나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으나 신약 시대에는 헌금(돈)을 드린다. 헌금을 드리되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다 드리지 않고 대개 10분의 1을 드린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리고 난 나머지 10분의 9는 우리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10분의 9도 하나님의 소유다. 우리의 재능과 노동력을 사용하여 번 돈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이다.

최첨단 산업에 근무하여 연봉을 억대로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로지택(雨露之澤)의 은혜를 내려주시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으므로 신자는 주인의 소유를 신실하게 관리하는 청지기적 자세로 우리의 필요를 위해 주신 10분의 9까지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용처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10분의 1을 드렸다고 하여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신약교회 성도가 드리는 10분의 1은 구약의 십일조 규례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헌금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10분의 1을 내었으니 내 의무를 다했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런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았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다(눅 18:9-14).

따라서 신자는 정확한 비율로 헌금했다는 것으로 자위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명한 바대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되고 감사하는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후 9:7).

그러면 하나님께 어느 정도를 드려야 하는가?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로 헌금해서는 안 되며, ‘이런 정도는 나에게 큰 부담이 안 된다’는 수준으로 내어서도 안 된다. 헌상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로 자기 전부를 대표하여 드리는 일인 만큼, 액수나 요율에 억매이기보다 자신이 드리는 금액에 어느 정도의 무게를 느낄 만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가 주일예배 때에만 헌상한다. 그런데 원칙적으로는 예배드릴 때마다 헌상해야 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구역예배 때에도 헌금순서를 두었던 것이다.

서구 개혁교회는 예배 시간에 두 번 헌상한다. 한 번은 교회 살림살이(경상비)를 위해서, 또 한 번은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위해서 헌상한다. 헌금을 거둘 때에도 헌금함에 넣는 방법이 아니라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저녁 예배 때에도 낮예배와 똑같이 두 번 헌상한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행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중고등부 때나 청년 때에는 예배 시간마다 헌상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취직하여 첫 월급을 받기라도 하면 일부는 부모님 내의를 사드리고 나머지는 모두 헌금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지금도 그래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필자가 젊었을 당시 한국교회 신자들의 일반적인 정서가 그랬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예전에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에 비해 지금에 와서 성도들은 헌금을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 여건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들게 생활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다고 하여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대로 많든 적든 자기 수입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께 헌상해야 한다(고전 16:2).

교회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한 일이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나머지 교회는 교인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고, 신자들은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 교회의 처사를 매우 신앙적이며 신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분명 잘못된 일이다.

성경은 헌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치도록 명하고 있다. 또한 구속받은 신자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 곧 하나님을 예배할 때마다 그분의 왕되심과 주되심을 인정하는 표시로 헌상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바라고 말씀한다(시 76:11).

교회는 신자가 마땅히 행할 바를 강조하는 일을 부담스러워 해서는 안 되며 신자는 마땅히 행할 바를 기쁨으로 감당해야 한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