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그노 이야기(69)
사선에 선 목회자: 교회 재기의 불씨, 부르쏭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부유한 상인의 아들 끌로드 브루쏭(Claude Brousson, 1647-1698)은 남프랑스 님(Nîmes) 출신의 법학 박사였다. 그는 루이 14세가 위그노의 예배를 엄금하고 신교 예배당을 파괴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중차대한 변호인 역할을 함으로써 위그노 교회를 방어하였다. 이런 와중에 브루쏭은 1683년에 망명을 결심하고 제네바를 거쳐 로잔으로 건너갔다. 1685년 10월 17일, 낭뜨 칙령이 철회되자 브루쏭은 유럽 전역에 넘쳐나는 위그노 난민을 위해 호소문을 작성하고 다섯 달 동안 유럽의 신교 국가와 도시들을 돌면서 선처를 구했다. 이때 『프랑스 위그노의 현황』(1685)과 『유럽 신교 신자들에게 보내는 프랑스 신교 신자들의 편지』(1686)를 저술했다. 브루쏭은 네덜란드에서 삐에르 쥐리외(Pierre Jurieu, 1637~1713)를 만났는데, 프랑스 신교가 만난 험난한 시대를 요한계시록에 빗대어 해석하는 예언적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다.
1688년 8월 초, 브루쏭은 신교 국가들에서 난민으로 머물고 있는 위그노 목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준엄한 책망을 퍼부으면서 목회 금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로 돌아가라고 강하게 촉구했다. 그러나 그의 권유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브루쏭은 결국 자신이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다른 이들의 독려도 있었지만, 난민 목사들을 비난한 것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꼈고, 귀국하는 것이 자신의 글을 프랑스에 배포하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689년 성탄절에 목사로 임직받은 브루쏭은 즉시 비밀집회와 순회 목회를 시작했다. 주로 남프랑스 세벤느(Cévennes) 지역과 저지대 랑그독(Bas-Languedoc)에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밤에는 설교를 했고, 낮에는 숨어 지내면서 글을 썼다. 법학자에서 설교자로 바뀐 브루쏭 목사는 심야 집회와 문서 보급 등으로 끊임없이 활동을 전개하여 ‘십자가 아래 교회’의 신자들을 지원함으로써 ‘광야교회’를 재기시키는 불씨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에 한 세기 동안 지하 교회가 비밀리에 유지되었다. 그가 1689년부터 1693년까지 고난 가운데 밤중에 프랑스의 광야와 동굴에서 전한 설교들은 『광야의 신비한 만나』(1695)라는 설교집으로 출판되었다.
1689년, 신교 국가들이 체결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과 빌렘 오라녜의 영국 왕위 등극으로 야기된 반(反)프랑스 연합은 랑그독과 세벤느 위그노들이 프랑스 왕정에 봉기할 위험도를 가중시켰다. 브루쏭이 이런 조치가 루이 14세를 유도해서 타협안을 창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외부의 개입에 대한 마음을 잠시 품었을지 모르지만, 비폭력을 행사하는 쪽에 그대로 머물렀다. 이런 점에서 브루쏭은 비둘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래서 오라녜를 편드는 연합군이 프랑스에 진입했을 때, 위그노들은 브루쏭의 노선을 따라 프랑스 국왕에 대항하여 무장봉기 하는 것을 마다하였다.
브루쏭은 가톨릭에게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바스빌(Basville) 종교감시관은 그의 머리에 금화 500루이를 걸었다. 그러나 브루쏭은 체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재차 로잔으로 갔다가 네덜란드를 방문했다(1693년). 그는 여러 차례 심각한 위험을 무시하고 북프랑스로 돌아가서 스당(Sedan)을 방문하고, 노르망디로 이동해서 비밀 집회를 열었다. 부르고뉴에서는 신분이 노출되어 추격을 받자 다시 스위스로 탈출하였다. 1697년에 네덜란드에서 한 해를 보낸 다음, 아우크스부르크 동맹과 루이 14세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프랑스로 발걸음을 떼었다. 브루쏭은 도피네(Dauphiné)와 비바래(Vivarais)를 차례로 거치면서 비밀 집회를 인도하였고 베아른(Béarn)으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몽펠리에(Montpellier)로 이송되어 바스빌 종교 감시관에게 유죄 판정을 받았다.
1698년 11월 4일, 브루쏭은 사형당했다. 그는 만 명이나 되는 구경꾼들이 둘러선 사형대에서 시편 34편을 노래했다. 그러나 20명이 북을 치는 바람에 찬송 소리가 삼켜져 버렸다. 본래는 수레바퀴에 매달아 팔다리를 부서뜨리는 차형(車刑)이 선고되었지만, 시행 직전에 교수형으로 바뀌었다. 사형 후에 시신은 수레바퀴에 달려 수족이 부서졌다. 그러나 브루쏭이 광야 교회 재기에 붙인 불씨는 20년 후 엉뚜완느 꾸르(Antoine Court)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마침내 찬연히 타올랐다.
[브루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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