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66_사선에 선 목회자: 어둠 속의 설교자 다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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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이야기 66

사선에 선 목회자: 어둠 속의 설교자 다이예

 

쟝 다이예 · 구글자료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주석과 설교, 그리고 변증과 논쟁에 뛰어난 쟝 다이예(Jean Daillé, 1594-1670)는 위그노가 루이 13세에게 잔혹하게 짓밟히고 루이 14세에게 뿌리째 뽑히는 어둠의 시대에 사역한 목사였다. 그는 공탁금 징수인의 가정 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열 살 때부모를 여읜 다이예는 동생들과 함께 외가의 삼촌들에게 맡겨졌다. 그는 라틴어, 인문학, 수사학 등을 차례로 배운 후, 1612년에 소뮈르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이예는 같은 해 10월부터 당시 소뮈르 행정관 이었던 위그노 정치인 뒤플레시-모르 내(Duplessis-Mornay)로부터 손자두 명을 교육해달라는 부탁을 받았 다. 1619년 10월, 그는 두 청년을 데리고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네덜란 드를 방문하는 장거리 여행을 했다.

1623년에 목사로 임직한 다이예는 잠시동안 뒤플레시-모르내의 보좌 목사로 일했고, 1625년 5월에 결혼할 때쯤 소뮈르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다이예 목사는 파리를 방문 하는 동안 샤릉똥(Charenton) 교회 에서 설교하고 세례식을 집례했는데, 큰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마침 뒤랑 (Durand) 목사가 임종을 맞이한 시점이라 다이예는 그의 후임으로 청빙을 받았다. 그러나 청빙 과정에서 샤릉똥 당회가 치리서를 정확하게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노회가 샤릉똥 당회를 시찰하는 일이 벌어졌고, 당회는 총회에 상소했다. 결국 메스뜨레자 (Mestrezat) 목사가 중재에 나섰고, 드르랑꾸르(Drelincourt) 목사가 탄원서를 제출하여 다이예의 청빙을 허락받았다. 다이예 목사 부부는 1626
년 9월에 파리 교외인 생제르맹에 임시 둥지를 틀었고, 2년 후에 외동아들 아드리앙(Adrien, 1628-1690)이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태어났다. 1630년 6월, 다이예 목사는 파리 중심부로 이사하였는데, 1년도 안 되어 부인을 전염병으로 잃었다. 그는 재혼하지 않았다.

다이예 목사는 개혁파 진영에서 대체로 온건파에 속한다. 1654년에 알랑송 총회와 샤릉똥 총회에 모제 아미로(Moses Amyraut)의 구원론을 옹호하는 변증서를 제출하여 네덜란드 흐로닝겐(Groningen) 신학교 교수와 거센 논쟁을 촉발시켰다. 다이예 목사는 1659년에 루이 14세 치하에서 프랑스의 마지막 총회가 된 루동 (Loudon) 총회의 의장을 맡았는데, 알랑송 총회(1637)와 샤릉똥 총회에 서처럼 그리스도께서 택자 뿐 아니라 만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아미로의 보편 구원론을 변호하였다.

다이예 목사는 1631년에 “교부 문서의 바른 사용에 관하여”를 출판했다.
이것은 20년 후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교부의 권위를 결정적인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그는 교부 문서가 망가진 것이 많고, 온전하더라도 논리적 이지 않다는 견해를 폈다. 이어서 그는 『개혁파 교회를 위한 변증』(1631), 『성경에 기초한 신앙』(1634) 같은 책을 썼다. 다이예 목사는 빌립보서와 골로새서의 방대한 설교집을 내서 설교자로 명성을 날렸다.
1653년 4월, 다이예 목사는 아들 아드리앙이 라로쉘 교회의 네 번째 목사로 청빙 받아 가는 길에 동행했다.
1657년, 샤릉똥 교회의 목사 두 명이 연거푸 사망하였다. 모뤼스(Morus) 가 포숴(Faucheur) 목사를 대신했 고, 아드리앙이 메스뜨레자 목사를 대신했다. 아드리앙은 1658년 7월 1일에 파리에 와서 다음 주일부터 목회

를 시작하였고, 1685년 낭뜨 철회로 추방되어 1690년 5월 스위스 취리히 에서 생을 마쳤다. 1669년 11월, 75 세의 다이예 목사는 선임자 드르랑꾸르 목사가 사망하고. 협동하던 모뤼 스가 중병에 걸리는 바람에, 쟝 끌로 드(Jean Claude, 1619-1687) 목사와 함께 샤릉똥 교회의 모든 목회를 걸머져야 했다.
다이예 목사는 몇 달 후 사흘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76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샤릉똥 교회 묘지의 부인 옆에 묻혔다(1670.4.15).

후일 아들 아드리앙 목사는 많은 논쟁서 외에도 다량의 감동적인 설교를 남긴 부친에 관한 전기를 썼는데, 이런 말을 전한다. “설교에 관해 말하자 면, 우리 아버지처럼 수준 높게 많은 책을 펴낸 사람이 많지 않다” 다이예 목사는 루이 14세의 용기병 창설과 낭뜨 철회가 빽빽한 먹장구름처럼 밀려오는 시기에 설교로 교회를 지킨 어둠 속의 설교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