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인간을 조종하는 서브리미널 효과_이영하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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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조종하는 서브리미널 효과

 

이영하 집사_ 북서울노회 양문교회

코카콜라 광고는 사 람 들의 잠재의식을 겨냥했다. 일명 ‘서브리미널 광고’라고 불리는데, 찰나의 메시지로 인간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잠재의식 침범 기법이다. 한 심리학자가 코카콜 라를 이용해 서브리미널 효과를 실험했고, 코카콜라사가 차용했다.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대중매체를 통해 코카콜라에 대한 영상이나 음성을 단 몇 초만 노출시킨다. TV 속 유명 스타가 코카콜라 자판기가 놓인 거리를 걷는 다든가, 날아가는 비행기를 쳐다보는데 코카 콜라 로고가 적힌 전광판이 한 프레임에 잡힌 다든가 하는 식이다.

오늘날 광고뿐 아니라 드라마, 영화, 연예인 이나 정치인의 이미지 PR, 그 외 여론몰이까 지도 서브리미널 광고가 광범위하게 퍼진 데에는 서브리미널 광고를 시도한 코카콜라사의 폭발적인 매출 증가로 서브리미널 광고가 인간의 무의식을 조종한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방법이 기독교 혐오를 조장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점령, 코카콜라와 방식은 똑같다. 몇 분 몇 초의 짧은 시간, 교회와 성도에 대한 부정적 장 면을 대중매체에 지속적으로 내보낸다. 대중 에게 파고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은 집단 지성을 일으키고 그것은 거짓말처럼 사실이 된다. 재미와 감동, 가족애, 운명적 사랑, 판타지 법정물 등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드라마나 영화를 떠올려보자. 주인공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악역은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거나 천사의 얼굴을 하고 교회에 다닌다. 사회성을 갖춘 소시오패스는 음지에서 범죄를 저지르지만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이런 장면은 흔해 빠진 클리셰로 지루하기까지 하다.

이중적 성향과 비도덕적 인격은 기독교인의 대중적 이미지가 되었다. 목회자 가족은 그들 만의 공간에서 범죄 집단 같은 대화를 나누고 대대손손 불로소득의 삶을 따놓은 금수저, 재력가로 묘사된다. 마르크스 비평으로 해석하 자면, 피지배층(대중)의 혐오는 지배층을 향하 므로 목회자와 장로, 권사는 결코 피지배층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로써 피라미드 계층의 거대 다수인 피지배층(대중)이 기독교인을 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간혹 피지 배층(노동계급)으로 표현되는 기독교인은 비뚤어진 종교사상으로 가족에게 폭력과 해악을 끼치지만 교회에서는 헌신, 봉사하는 역할 로 나온다. 교회는 그를 노예처럼 부리고 신의 징벌을 운운하며 협박하면서 가스라이팅 한다. 기독교인의 캐릭터는 이토록 일반화된지 오래다.

서브리미널 광고의 특징은 지속성이기 때문에 극에 몰입한 시청자들은 기독교인이 등장하기만 해도 습관적으로 불편하고 께름칙한 감정에 휩싸인다. 또한 서브리미널 광고 방식은 매우 교묘해서 세상이 편향된 시선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캐릭터가 실제로 교회 내에 존재한다고 사람들은 느낀다. 그로 인해 기독 교의 이미지는 이단, 사이비 단체와 별반 다를 게 없어졌고 비기독교인에게는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 되었으며, 기독교인에게는 문제가 닥쳤을 때 교회를 떠날 빌미와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한다. 인간의 무의식을 조종하는 서브리미널 효과는 기독교의 인식을 왜곡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고 지금도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깨달아야 한다. 하나 님의 자녀인 우리가 자각조차 못한 채 무의식을 점령당하며 OTT를 즐기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사단)은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모욕하는데, 모욕감을 느끼는 기독교인은 별로 없는 작금의 사태는 통탄할 일이다. 일례로 주인공의 비참한 과거에 이입되어 범죄 급의 복수를 용납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영적 혼미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악역의 말로가 비참할수록 쾌감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일이 아닌가. 사단이 놓은 덫을 알았다면 무의식의 침범에 길들 여지지 말고 의식적으로 기독교를 모욕하는 요소를 집어낼 수 있어야 한다.

세기의 걸작이나 명작이 탄생 되어도 그 안에 기독교를 폄훼하는 내용이 있다면 작품의 감동은 무의식을 파고들려는 사단의 미끼로 봐야 하는 게 옳다. 이것이 과대 해석으로 비칠지 모르나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얻고 구원받았다면 이 해석은 성도의 마땅한 인식이자 자존심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범람하는 OTT의 시대 속에 우리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있다. TV가 없는 가정이 없고, 손에는 핸드폰이 항상 들려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무의식이 점령된 세상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 운명이다. 반대로 우리는 OTT를 즐길 자유 또한 있다. 단, 무한 한 복의 통로인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악한 영에게 내어주지 말자는 것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 우리의 잠재의식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자. 사단의 통로를 차단해 마음과 생각을 지켜내자. 사단이 사활을 걸고 공격하는 미디어 전쟁에서 승리하자.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나님은 영적 싸움을 하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준비하셨다고 말씀 하신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전쟁은 하나님께 있다. 이미 이긴 싸움을 하고 있다는 담대함으로, 세상에 물들지 않겠다는 각오로 첫발을 뗀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자신한다. 서브리미널 효과, 정복당하지 말고 정복하자.
*서브리미널(subliminal)은 ‘잠재의식 상태’ 또는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자극’ 을 의미하는 심리학적 용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