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교직자 수양회 설교] “사랑이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15)_박완철 목사

0
94

 

“사랑이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15)

 

박완철 목사(남서울은혜교회)

 

 

고통의 문제

 

오늘 말씀을 통해 저는 우리 동역자들과 함께 고통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고통은 사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공통으로 겪는 문제입니다. 특히 많은 사람을 상담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이 고통의 문제는 항상 가까이에 있습니다. 신자들이라고 해서 이 고통을 피해 가지 못합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무거운 고통에 짓눌려 감당하기 어려워서 끙끙거리면서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때가 있습니다. 고통에 우리가 익숙한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고통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속에 우리가 다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유명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하던 자매가 2학년 재학 중에 근육 무기력증에 걸렸습니다. 결국 학교를 중단하고 투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0대 초반에 발병했는데 이제 나이가 40살이 넘었어요. 처음에는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이었는데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이제는 말도 거의 할 수가 없고 침대에 몸을 맡기고 누워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간호하는 자매의 어머니는 권사님이신데, 교회에서 여러 가지 사역에 열심히 참여하고 섬기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제 딸아이 옆에 제가 머물러 있으면 하루도 못 견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나와서 주님의 일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게 저에게는 큰 은혜이고 오히려 쉬는 시간입니다.”

 

고통은 개인적인 것만 있지 않습니다.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날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와, 또 그로 인한 고통의 심화, 빈곤의 문제, 전쟁이나 테러와 또 수많은 불행한 일들과 비참한 고통에 대한 뉴스를 듣습니다. 지금도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다양한 종류의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고통의 현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참한 지옥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도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시는 것인가?” 아프리카 대륙에 처참한 가뭄이 닥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잡지인 라이프지에 죽은 자신의 아기를 품에 안고 야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이 실렸습니다. 유명한 전도자 빌리그래함 목사의 절친이었던 찰스 템프턴이라는 미국의 목회자는 비를 내려주지 않는 하나님이 과연 자비와 사랑의 신일 수 있는지 의심하며 신앙을 떠나 불가지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도 과연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시는가를 질문하게 만드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도 어린 나이인데 뇌종양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거나, 성실한 가장이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가? 어떤 여론조사 전문가가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가장 많은 응답자가 “세상에는 왜 이렇게 아픔과 고난이 많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고통과 관련하여 신앙인들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고통의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알겠는데, 그분의 손 안에서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우리가 알고 그렇게 배웠는데 하나님이 왜 이 고통을 나와 우리 가정에 허락해 주시는지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돌아온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야속하고 억울하고, 그리고 원망스럽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따져보고 물어보고 싶은 사람도 많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을 위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는데, 내게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의사로서 병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시던 집사님 한 분이 선교사로서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정리해서 복지기관에 기부하고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어려운 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선교의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파킨슨병이 찾아왔습니다. 거동하는 것도 어려워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교 일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누군가 옆에서 부축해주고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걸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 선교사님이 뇌종양 판정을 받았습니다. 큰 수술을 한 이후에도 장기 입원을 해야 했습니다. 얼마 전 선교사님이 저에게 전화하셨습니다. “목사님, 내 아내가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네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희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위해서 기도를 해드렸지만, 참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될지 난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목회자니까 고통당하는 교인들을 심방도 하고, 위로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는 별로 위로가 안 됩니다. 누구한테 내 고통을 쉽게 함부로 이야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때는 기도조차도 따로 잘 되질 않는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고난받는 욥도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위로한다고 찾아왔지만, 위로는커녕 고통을 더해주었습니다. 욥은, “정말 하나님을 만나서 듣고 싶다. 나는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왔는데, 하나님을 섬겼는데 왜 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라고 합니다.

 

 

고통에 이골이 난 사람 바울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말씀을 보면 고통에 이골이 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을 크게 보면 다메섹 이전과 다메섹 이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그의 인생의 방향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의 달라진 삶의 결과를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을 보면 바울은 “자기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지금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단 한 번도 고통에 굴복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렇게 끝도 없는 고통을 어떻게 참고 인내하고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을 오늘 본문 14절에서 찾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십니다. 이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수많은 주님의 사람들이 세상의 성공과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고통의 현장에 기꺼이 들어갔습니다. 이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수많은 선교사가 구한 말 열악한 조선 땅에 와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의료선교사인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은 1912년에 32살의 나이로 조선 땅에 옵니다. 고아와 과부를 힘을 다해 돕습니다. 주로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22년 동안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 나환자들, 결핵 환자들을 많이 돌봤습니다. 살아생전에 이미 ‘나환자들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54세에 만성 풍토병과 과로와 영양실조로 숨지게 됩니다. 그는 홀몸으로 와서 22년 동안 조선 사람의 친구로 산 것이 아니라 아예 조선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한복을 입고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으면서 고무신을 끌고 살았습니다. 서서평 선교사가 숨지자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당시 수천의 시민들이 운구행렬을 따라가고, 많은 나환자가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면서 오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의 유품은 고작 담요 반 조각, 동전 7전, 그리고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습니다. 통장이 있었지만 다 사역을 위해 써버려서 통장의 잔액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시신마저도 그의 유언에 따라서 의학 연구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서 선교사의 한결같은 기도 제목은 오직 한 가지였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조선 땅에 임할 수 있도록 나를 사용하여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는도다

 

지금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그리고 나를 보고, 내 상황을 쳐다보면 목회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생각도 때로는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보게 됩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나는 왜 아직도 이 자리에 있는가? 그 동기가 무엇인가? 다른 대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이런저런 목회의 기술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목회에 무슨 기술이 있겠습니까? 무슨 비결이 있겠습니까?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끝없이 구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 다 있어도 이 사랑이 없으면 내 마음이 허전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이 텅텅 비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머리로만 그 사람을 이해하고 머릿속에서만 그 사랑이 그치고 가슴까지 오지 못하고 손발까지 움직이지를 못하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십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이나, 이 땅에 와서 자신을 희생하고 조선 사람들을 위해서 뼈를 묻은 선교사들이나 이 동일한 원리로 이겨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주님이 주신 목회의 자리를 끝까지 잘 담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