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
절대왕정을 추구한 루이 14세는 용기병을 창설하여 위그노를 대대적으로 박해하였다. 위그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신분을 박탈당하였고, 감금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남자의 경우에는 갤리선에서 쇠사슬에 매여 노를 젓는 중형을 받기도 하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교의 길을 갔다. 1685년 루이는 위그노의 신앙을 박멸할 심산으로 할아버지 앙리 4세의 낭뜨 칙령을 철회하였다(퐁뗀블로 칙령). 정부가 프랑스 이탈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위그노가 정겨운 고향을 떠나 원근 각처의 나라들로 피신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1670년경 프랑스에서 위그노의 총수는 90만 명에 달하는 절정의 시기를 맞이하였는데, 낭뜨 철회의 결과로 그 가운데 16만 명에서 17만 명이나 탈출하는 극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은 당시 프랑스 신교 신자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이며, 프랑스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 육박하는 인구였다. 위그노의 해외 이주 통계는 다음과 같다. 영국 4만 명, 아일랜드와 신대륙(미국) 1만 명, 화란(남아공 케이프주 포함) 5만 명, 독일 3만 8천-4만 명(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 2만 명), 스위스 2만 명, 덴마크와 스웨덴 2천 명, 러시아 3백-5백 명 등이다.
해외 이주의 경로를 살펴보면, 프랑스 북부에서는 40퍼센트가 육로를 통해 독일, 화란, 영국으로 갔고, 프랑스 서부에서는 해로를 통해 유럽 전역의 항구로 건너갔으며, 프랑스 남부에서는 16퍼센트가 스위스를 거쳐 독일과 북유럽에 진출하였다(동부도 같은 경우). 위그노들은 강제로 가톨릭으로 전향하거나 지하에서 불법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엄벌로 금지된 망명이라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다. 그들이 정든 고향과 값진 재산을 과감히 포기한 까닭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탈출은 많은 경우에 먼저 이동 경로와 목적지를 정찰하는 것으로 준비되었다. 이 일은 대체로 전직 목사들이 맡았다. 규모가 큰 그룹이나 가족이 탈출하려고 할 때는 먼저 한두 구성원이 목적지를 탐지해보거나 정착 가능성을 가늠해보러 다녀왔다.
루이 14세가 낭뜨 칙령을 철회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한 지 겨우 열흘이 지난 1685년 10월 29일, 독일에서는 프러시아 공이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위그노들을 영입하겠다는 포츠담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들의 탈출을 도왔다. 마침 신성로마제국은 30년 전쟁 동안(1618-1648) 전쟁과 기아와 흑사병으로 인구의 3분의 1을 잃은 상태였는데, 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의 사정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인구와 노동력의 절감을 보충해야 할 필요성이 극에 달한 차에,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베를린에 프랑스 위그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할애하였다. 1701~1705년에는 위그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베를린에 프랑스인 교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주하는 위그노들이 해외에서 꼭 환영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스위스의 경우를 보면, 신교를 믿는 지역들과 도시들도 위그노들이 이주해오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스위스로 넘어온 위그노 이주자들 가운데 베른이 50퍼센트, 취리히가 30퍼센트, 바젤이 12퍼센트, 솨프하우젠이 8퍼센트를 영입하였다. 하지만 많은 위그노에게 스위스는 단지 경유지가 되고 말았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 혼자 남은 여성들, 아이 딸린 과부들은 체류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매력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재물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영입되었다.
다양한 영역에서 고급 기술을 지닌 위그노들은 유럽의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스위스의 시계 제조와 초콜릿 가공, 프러시아의 담배 재배와 비단 생산, 남아공의 포도주 산업 같은 것이다. 영국으로 건너간 위그노들은 놀라운 기술력을 전수하여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