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32] 용기병의 만행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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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병의 만행

앙리 4세의 손자 루이 14세는 다섯 살에 왕이 되었다. 어린 왕이기에 모후 오스트리아의 안느가 섭정을 맡았고, 이탈리아 추기경 마자랭이 재상으로 위세를 떨쳤다. 루이는 23살이 되던 해에 마자랭이 사망하자 독자적인 통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태양 왕’(Roi Soleil)으로 불리는 루이는 절대왕정을 꿈꾸며 ‘한 신앙, 한 헌법, 한 국왕’이라는 구호 아래 프랑스의 대통합을 추진하였다. 그 목적으로 신교를 분쇄하여 위그노를 가톨릭으로 돌이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루이 14세의 치하에서 위그노 박해는 절정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1681년, 루이 14세는 ‘용기병’(Dragonnade)을 창설하여 위그노 박멸에 박차를 가하였다.

용기병을 본격적으로 가동한 인물은 낭뜨 칙령 철회를 필생의 염원으로 품었던 재상 르뗄리에와 그의 아들 루브와였다. 용기병은 ‘군화 신은 선교사들’이라고 불리었다. 그들은 은신하고 있는 위그노 목사를 색출하거나 빈들이나 산속 동굴에 모인 위그노 비밀집회를 급습하는 일을 하였다. 용기병의 악랄한 수법은 떼를 지어 위그노의 가정에 숙영하면서 신교 신앙을 철회할 때까지 괴롭히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위그노 가정에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끼칠 뿐 아니라 극악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에게는 살육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허락되었다. 성폭행, 약탈, 세금 부여, 고문 등이었다. 그들은 신앙 철회자의 숫자를 올리려고 별짓을 다 고안해냈다.

위그노에게 강제로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든 다음, 취한 상태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 그것을 위그노 신앙을 철회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군인들은 위그노에게 고통을 더하는 야비한 방법들을 짜내고 게임을 하듯이 즐겼다. 그들이 자주 사용한 고문은 입에 깔때기를 꽂아 넣고 끓는 물을 붓거나 맨살을 불로 지지는 것과 몸을 하염없이 천장에 매달아 놓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특히 손목을 등 뒤로 묶어 매다는 고문은 팔을 탈구시켜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쟝 부륀이라는 12살짜리 고아가 있었다. 위그노 신앙을 가진 아이는 체포되어 만행을 겪었다. 용기병들은 부륀이 기도를 못 하도록 가혹하게 다루었는데, 어떤 수단도 통하지 않자 변소에 빠뜨려 죽게 했다.

위그노를 말살하기 위해 용기병을 가동한 르뗄리에가 필생의 사업으로 추진했던 낭뜨 칙령 철회는 마침내 그가 죽기 여드레 전에 실현되었다.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여 할아버지 앙리 4세의 낭뜨 칙령을 모조리 철회하였다. 용기병을 가동한 지 4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고작해야 11개의 조항을 가진 퐁텐블로 칙령은 위그노를 철저하게 말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위그노의 예배와 학교를 금지하고, 설교자를 추방하고 예배당을 파괴하며, 위그노 자녀에게 가톨릭 세례를 강요하고 가톨릭 신앙교육을 의무화하며, 가톨릭으로 전향하는 위그노들을 우대한다는 것이다. 낭뜨 철회로 말미암아 수많은 위그노가 피난길에 올랐고 위그노 운동은 심각하게 와해하였다.

위그노 전쟁 발발 직전인 1561년과 낭뜨 칙령으로 전쟁이 종료되는 1598년 사이에 위그노 교회의 수를 살펴보면 급격하게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1561년 꼴리뉘는 프랑스에 2,150개의 위그노 교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1598년에 앙리 4세가 위그노 교회의 수를 조사시켰을 때, 951개 교회, 목사 800명, 목사후보생 400명, 27만 4천 가정(2,468 귀족 가정)과 125만 신도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위그노 반대 선전, 모진 박해, 그리고 거의 40년 동안 치른 전쟁이 위그노 운동의 전진을 방해하면서 교세를 상당히 약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루이 14세의 통치가 발돋움하던 1660년에는 교회 수가 813개로 줄어들었고, 낭뜨 칙령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기 전에 이미 용기병의 잔혹한 만행으로 말미암아 570개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낭뜨 칙령을 철회할 때쯤에는 겨우 243개 교회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낭뜨 철회와 함께 프랑스 전국의 위그노 교회들이 즉시 철거되기 시작해서 간신히 네 곳만이 우여곡절 끝에 남았다.

–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