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31] 라로쉘 함락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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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쉘 함락

루이13세의 즉위는 납덩어리처럼 위그노를 누르는 것을 의미했다. 가톨릭 어머니에게서 자라난 루이는 추기경 리슐리외를 재상으로 기용하여 부왕 앙리4세와 달리 위그노를 박해하는 쪽에 섰다. 루이의 가톨릭 통치에 부딪힌 위그노는 저항과 투쟁에 돌입했고 영국과 같은 프랑스의 적국들과 연합을 추구하였다. 이런 현상을 지켜본 리슐리외는 위그노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뿌리째 뽑을 마음을 품었다. 리슐리외는 자신이 위그노를 냉정하고 결연하게 반대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최대의 전투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위그노 거점도시 라로쉘 함락이다.

프랑스 중서부 항구도시 라로쉘은 북대서양으로 뻗어나가는 해상 무역을 바탕으로 상당히 부요하였다. 이 항구에는 수많은 선박들이 쇄도하였다. 염장한 육류와 어류, 아마포와 모직 의류를 실은 화란과 영국의 배들, 금가루와 생고무를 실고 온 서부 아프리카 선박들, 멀리 동양에서 수입한 향신료와 보석 그리고 향수를 나르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배들이 입항하였다. 또한 유명한 와인이나 소금 또는 고가의 지역특산품을 선적한 프랑스 배들이 여러 나라로 출항하였다. 위그노 상인들은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와 같은 경제력을 갖춘 라로쉘은 가톨릭 왕정에 저항하며 위그노 운동을 활발하게 지원하는 강력한 요새가 되었다.

리슐리외는 라로쉘의 저항세력을 궤멸시키는 데 집중했다. 1627년 8월부터 왕군이 라로쉘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라로쉘로 통하는 모든 육로를 끊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영국 같은 외국의 지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로를 봉쇄하여 항복을 받아낼 생각을 가지고, 리슐리외는 항구의 입구를 가로지르는 엄청난 장벽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다. 먼저 200척의 폐선을 일렬로 가라앉혀 함교를 만든 다음 양쪽에서 장벽을 세워나갔다. 리슐리외의 독려를 받은 군대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밤낮으로 험난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번은 공성 군대를 방문한 루이13세 자신이 사나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수행원들과 함께 돌을 날랐을 정도였다. 1628년 봄, 마침내 1.2km의 장벽이 완성되었다.

라로쉘 안에는 불길한 분위기가 크게 감돌았다. 아홉 달 동안이나 포위된 상황에서 시의회는 불굴의 지도자를 찾다가 쟝 귀똥을 시장으로 임명하였다. 귀똥은 라로쉘의 행정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주들 가운데 지도급 인사였고, 국왕과 싸우는 위그노의 항쟁 선단을 이끄는 제독으로 추앙되어 훨씬 큰 국왕의 선단을 여러 차례 이긴 경험이 있었다. 몸집은 작았지만 불굴의 정신을 소유한 귀똥은 시장을 맡는 자리에서 시의회의 탁자 위에 단검을 두면서 말했다. “여러분은 가장 먼저 항복을 제안하는 사람의 심장을 이 단검으로 찌르는 것을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만약에 나 자신이 항복을 제안할 시에는, 여러분이 내 심장을 찔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이 온 도시에 내려앉았다. 번화하던 항만은 유령 도시처럼 보였다. 시민군은 말과 개 그리고 고양이를 양식으로 삼더니, 급기야는 양피지 조각, 가죽 혁대, 쇠털을 끓여 끼니꺼리를 만들었고, 포위가 끝날 무렵에는 장화와 모자까지 삶아 먹고 있었다. 다섯 딸 가운데 두 명을 잃은 귀똥은 간신히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몸을 가눌 정도였지만 항복하는 것을 여전히 거부하였다. 그는 시의회 탁자를 단검으로 내리쳐 대리석 상판 모서리를 깨뜨리며 끝끝내 저항할 의사를 보였다. 지금도 시청사를 방문해보면 모서리 한쪽이 잘린 대리석 탁자가 놓여있다.

마침내 영국이 중재를 서서 강화를 제의하였다. 리슐리외가 승리를 거두고 라로쉘이 패배한 것이다. 14개월의 공성 기간 동안 라로쉘의 2만 7천 명의 시민 가운데 전사와 기아와 질병으로 겨우 5천 명 정도가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가운데 천 명은 전쟁의 여파로 얼마 되지 않아 죽어 나갔다. 이후 라로쉘의 위그노들은 아주 제한된 자유 외에 모든 권한을 상실하였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