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특강(총동문수련회 특강)] 넘어져도 일어나는 교회(하)_최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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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져도 일어나는 교회(하)

최덕수 목사(현산교회)

<지난 호 요약>

바른 신학에 기초하지 않은 교회는 잘못될 수 밖에 없다. 활발한 종교활동에 몰두하는 ‘실용주의’, 신비체험을 강조하는 ‘감정주의’, 지적 활동에만 치중하는 ‘지성주의’를 벗어나 전인격적 차원의 신앙성숙을 이루어야 한다. 합신이 견지하는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공교회적인 차원에서 발전되고 검증된, 교단차원을 넘어선 가장 보편적이고 성경적인 신학체계이다. 목회현장에서 개혁신학의 원리가 실제로 적용되어야 한다. 예배와 직제, 성례와 교회 정치와 같은 구체적인 부분부터 개혁신학에 근거한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4. 21세기 개혁교회 모델인 서구 개혁교회

서구 개혁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개혁교회를 비교적 건강하게 이루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개혁교회는 유럽 대륙에 살던 개혁교회 성도들이 2차 대전 직후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주한 이민자들을 통해서 세워졌다. 캐나다의 경우는 1950년에 교회를 세우고 1950년대 중반부터는 뜻을 같이 하는 부모들이 협의회를 조직하여 기독학교도 설립하였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과 유산을 물려받아 현재 건강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서구 개혁교회를 배울 필요가 있다.

1) 가정과 기독학교에서의 신앙교육

일반적으로 개혁교회 신자들은 자녀를 4-6명 가량 둔다. 5-60대가 되면 손주들이 많이 있고, 70대 정도가 되면 가족 수가 수십 명에 달한다.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교리공부를 시킨다. 식사시간은 단지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다. 가장이 시편을 부르고 성경이나 경건서적을 읽고 아이들에게 간단히 질문하며 대화한 다음 기도로 끝낸다. 생일날, 추수감사절, 성탄절 때 3-40명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교제한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성경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 성경이 있다. 인물과 사건들을 이야기처럼 각색하고 거기에 삽화를 더해서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아이들이 자라기 시작하면 어른들이 읽는 일반 성경을 읽는다. 교회에서는 목사를 통해서 신앙교육을 한다. 교리문답 교육을 13-14세를 전후로 5-7년 정도 받게 된다. 아이가 자라서 자기 입으로 신앙고백을 하면 서로 존중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가족 중에 유아세례를 받거나 입교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호주나 네덜란드에 사는 친척들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다.

캐나다 개혁교회 학교는 만 5세부터 다닐 수 있는 유치원(킨더카튼)이 있다. 5세 이전의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은 언제나 엄마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녀가 학교 다닐 연령이 되면 기독교학교를 보내거나 홈스쿨을 한다. 개혁교회 성도들은 언약의 자녀를 교육하는 일이 교회의 책임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령기 자녀를 두지 않은 개인이나 가정도 기독학교를 후원한다. 아이가 졸업하고 난 다음에도 부모들은 물론 심지어 조부모들까지 계속 학교를 후원한다.

기독학교 학비는 결코 싸지 않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겠다는 생각으로 학비를 감당한다. 학교, 교회, 가정이 삼각 편대를 이루어 자녀를 양육한다. 학교는 가정의 확장이기도 하고, 교회를 통한 완성으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로 이해한다.

2) 개혁교회의 다양한 면모

캐나다 개혁교회는 ‘호스트 패밀리’ 제도를 활용해서 교우들을 가정으로 초대한다. 식사는 스프와 햄버거 정도로 간단히 준비한다. 교회 로비나 주보에 금주의 호스트 패밀리 이름이 적혀 있고, 안내를 담당하는 분이 손님이 찾아오거나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우들을 호스트 패밀리에게 연결해 준다.

개혁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달리 직분의 동등성을 강조한다. 한국교회처럼 위계적인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목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각자가 맡은 역할을 감당한다. 그렇다고 젊은 목사가 연륜이 있는 목사를 존중하지 않거나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다고 해서 높은 사람 행세하지 않는다.

서구 개혁교회는 공교회성을 중시한다. 매달 교단 내 타 교회 목회자를 초청하여 예배 인도와 설교를 맡긴다. M.div. 과정을 마치고 갓 목사 안수를 받은 사역자를 목사로 청빙하는 교회도 많다. 본 교회 목사가 타 교회의 청빙을 받아 사역지를 옮기는 일은 한 교회 내에 1 구역장이 2 구역의 구역장을 맡는 일 정도로 받아들인다. 이는 교단에 속한 목회자들의 수준이 비슷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개혁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이 지향하는 신학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으며, 기쁘게 교회질서를 따른다. 심지어 담임목사가 없어도 선교에 힘쓰며, 대사회적인 선교와 구제에도 열심을 낸다.

개혁교인들은 전도에도 열심을 낸다. 지난 코로나 시기에는 스위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 담임목사가 교우들을 각자 차량을 타고 교회당 주변에 모이게 하고 교회 종탑 확성기로 설교하였다. 과거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들은 방학 때 뉴욕 시내에 나가 노방 전도를 했다. 미국 네덜란드 유산 개혁교회(HRC) 교우 중 어떤 이는 매주 그랜드래피즈 시내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심지어 비행기로 라스베이거스에까지 날아가서 복음을 전한다.

5. 개혁교회는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원칙적으로 교회설립은 공교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교회개척은 목회자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교회 개척은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땀을 흘리면서 신체의 특정 부위만 아니라 전체적인 근력과 순발력을 함께 키워야만 가능한 역도 경기에 비유될 수 있다. 역도 경기는 일반적으로 1차 시기에 성공해야 원하는 목표에 이를 수 있다. 1차 시기에 실패해도 2차 시기에 성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1차 시기에 실패하면 2차 시기에 성공할 확률이 현저히 줄어든다. 교회 개척도 이와 유사하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가장 많은 연료가 소비되는 것처럼 교회설립 초기에 가장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이때 최대한 속도를 높여 이륙하는 비행기처럼 목회자는 교회설립 초기에 모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정상 궤도에 진입하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지 풀이 한 번 꺾이면 재기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개혁교회의 틀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갖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를 담임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처음부터 개혁교회를 염두에 두고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에서도 이 일은 쉽지 않다. 건물을 세울 때 비계를 설치하여 작업을 마친 다음 비계를 걷어 내는 것처럼, 개혁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 개혁교회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엄격한 이들은 이런 작업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어떠한 보조 장치도 사용하지 않고서 온전한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아이가 기어 다니면서 다리에 힘을 키우고 그런 다음 가구나 물건을 붙잡고 일어서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걷는다. 개혁교회가 세워지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우리는 비둘기처럼 순결하면서도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시대적인 환경과 형편을 헤아리면서 점차적으로 거룩하고 순수한 교회를 세워야 한다. 하지만 순도 100퍼센트의 교회는 지상에 존재할 수 없다. 성경적인 교회는 가라지와 쭉정이가 하나도 없는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성과 실존성, 거룩성과 보편성이란 양극단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역사성만 강조하면 메마르게 되고, 실존성만 강조하면 주관주의와 신비주의로 치우치게 된다. 거룩성만 강조하면 보편성을 상실하게 되고 보편성만 강조하면 거룩성을 상실하게 된다.

신학연구는 치밀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옳고 그름에 따른 입장 표명 또한 분명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인 개혁신학 안에서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는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한다. 대체적으로 개혁신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진 이들이 신학에 대한 이해가 정교해질수록 타협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개혁주의 교리나 기본적인 개혁교회의 틀과 관계해서는 어떠한 형태의 타협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협력해야 한다. 자신의 신학적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타적인 자세와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개혁은 현실을 비판하는 비평가들이나 저격수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기간에 걸쳐 치석처럼 굳어진 비성경적 전통과 틀을 허무는 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님으로부터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일만 아니라 건설하고 심는 일로 부르심을 받았다(렘 1:10). 따라서 선지자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말씀 사역자들은 기존의 잘못된 관행과 오류를 깨부수는 일에만 열심을 내어서는 안 되고 싸매고 위로하며 심고 건설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를 세우는 일꾼들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자로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개혁교회를 설립하고 사역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은 개혁신학에 대한 올바르고 균형 잡힌 이해와 목회자의 성숙한 신앙인격이다. 개혁교회 목회자는 신학적인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성숙한 신앙인격도 구비해야 한다. 머리만 커져서는 안 되고 마음까지 넓어져야 한다. 아무리 깊이 있고 고상한 신학을 가지고 있어도 신학과 신앙을 가르치는 교사요 목사인 목회자 자신이 성숙하지 못하면 올바른 교회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가며

훌륭한 신학을 가지고 있고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훌륭한 교수가 있다 하더라도 개혁주의 신학에 맞는 꽃을 피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교회를 이루지 못하는 신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개혁신학의 꽃은 교회와 가정과 학교에서 피어나게 해야 한다. 특히 교회를 통해 활짝 피어나도록 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개혁교회 목회자들 중에 개혁신학을 탐구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교회를 세우는 실천 원리로는 적용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되면 신학과 신앙, 신학과 목회가 따로 놀게 되고 이런 식으로는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없다. 신학은 입술로만 아니라 삶으로 진술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론과 지식으로만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고 교회를 세우는 실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성례 시행, 직원 선출 등 개혁신학이 교회를 세우는 모든 면에서 실천적 원리로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다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 4:8-9). 그리스도인도 고난과 박해, 시험과 유혹으로 인해 넘어질 수 있다. 사도 베드로가 그랬다. 그러나 그는 돌이켰다. 베드로의 돌이킴은 주님의 기도에 기인한다(눅 22:32). 잠언 기자는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난다고 하였다(잠 24:16). 의인의 회중인 교회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교회라도 흔들릴 수도 있고 심지어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는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 교회여!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