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죽음 (시 116:15)
김학유 총장(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고 김명혁 교수님은 11세의 어린 나이에 신앙의 자유와 주일성수를 위해 이북에서 남하했습니다. 김 교수님의 아버지는 순교자인 김관주 목사님입니다. 김 교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평양의 ‘서문 밖 교회’에서 배운 대로 평생 주일성수를 철저히 실천했습니다. 외국 여행 중에 아무리 중요한 약속이 있어도 주일 날 비행기를 타지 않기 위해 여행 일정을 변경할 정도였습니다. 목사님은 이성봉, 김치선, 손양원, 한경직 목사님 등으로부터 귀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으셨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손봉호 장로님, 이상복 목사님과 함께 서울대 기독 학생 운동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후 총신대학 대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던 중, 1979년에 학내 사태가 심각할 지경에 이르자 1980년에 박윤선 박사님과 함께 합동신학대학원(합신)을 설립했습니다. 한국교회개혁을 위해서는 바른 목회자들을 양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합신에서 미래 교역자들을 키우시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복음주의 역사학자로서 WCC,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의 위험성을 한국교회에 널리 알리고 가르쳤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정확히 간파하고 한국교회에 좌경화된 신학이 더 이상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학문과 실천을 통해 한국교회들을 바르게 지도했습니다.
목사님은 역사학자인 동시에 선교학자로서 유진 벨 재단을 통한 북한선교, 영등포 쪽방촌 빈민선교, 러시아 선교, 이슬람권 선교 등 수많은 선교사역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선교 제한지역 방문을 여러 차례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김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서도 많은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KEF),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아시아 복음주의협의회’ 등을 통해 복음주의 교회들의 연합과 상생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학자요 목회자로서 ‘강변교회’를 개척하여 평생 교인들을 양육하고 성장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목회를 통해 교회와 사회를 동시에 책임지는 총체적 사역의 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앙인들만을 위한 게토화 된 교회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이웃을 섬기며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실천하였습니다. 은퇴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직전까지 전국의 미자립 교회들을 돌보는 사역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주일마다 시골 교회들을 방문하여 설교하였고, 가난한 교회들의 물질적인 필요들을 채워주었습니다. 김 교수님의 사망원인도 주일 날 시골 교회에 설교하러 가다 발생한 교통사고 때문이었습니다.
김 교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교자가 되기를 소원하였다고 합니다. 김 교수님은 자신의 소원대로 복음을 전하다 이제 영광스러운 순교의 면류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김 교수님은 평생 순수하고 맑은 신앙을 갖고 살았고, 어리석을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대로 믿고 실천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성경을 바보같이 믿는 학자요 목회자요 운동가였습니다. 이러한 김 교수님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한국교회 안에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을 귀중하게 보신다고 하십니다. 평생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았던 고 김명혁 목사님의 죽음 또한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아주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