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고 김명혁 교수 추모의 글(박범룡, 이수환, 허태성, 황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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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명혁 교수 추모의 글

박범룡 목사(증경총회장)

김명혁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누군가가 카톡으로 알려왔다. 가슴이 철렁거렸고 머리가 멍하였다. 처음에는 오보처럼 느껴졌다. 정신차리고 확인하여 보니 사실이었다. 오호라. 올해 좀 늦게나마 김목사님께 설 세배를 가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아픈 비보를 들고 말았다. 춘천 지역 어느 작은 교회 설교하러 가시다가 사고로 소천 하신 것이다. “순교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시더니 목사님 순교하셨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맡은 일에 목사님은 항상 충성이셨다. 합신 로비에 걸려 있는 정암 박윤선의 휘호대로 지사충성(至死忠誠)의 삶을 사셨다. 나에게 목사님은 충성의 모델이셨다. 하나님께 충성이셨고, 말씀에 충성이셨고, 주일 성수에 충성이셨다. 한국 교회의 주일 저녁 예배가 주일 오후로 전환되는 것을 마음 아파하셨다. 박윤선, 한경직, 방지일, 장경재 등 선배 어른들을 섬기는데도 충성이셨다. 순교자들의 자녀들을 위로하시고 돌보시는데 충성이셨다. 은퇴 후 그는 주일이 되면 30명 미만의 교회들을 찾아가 설교하셨다. 가실 때는 늘 선물을 갖고 가셨다. 충성이 무엇인지 다시 배운다. 별명이 “몰라 몰라 통 몰라”였던 것은 주님 밖에는 “통 몰라”의 충성이었다.

목사님은 사랑의 실천자이셨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셨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예쁜 스티커들을 늘 갖고 다니셨다. 연변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금을 모아 친히 찾아가셔서 전달하셨다. 그런 때는 수수 어린이셨다. 내가 사역하던 중국까지 내외분이 오셔서 이 지역 사역자들과 서안사랑 한인 교우들에게 점심을 호텔 식당에서 대접해 주셨다. 목사님은 사무실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점심은 물론 차비라면서 강권하여 오만 원씩 쥐여주셨다. 거절할 수 없는 제자들 사랑의 마음이었다.

김 목사님이 화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는 온유하셨다. 착하셨다. 나는 여러 번 사택까지 찾아가 불평을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 같았으면 버릇없다고 화를 낼 만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설득해봐” 하면서 웃으실 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참 버릇이 없었다. 여기에 회상하여 쓰기에도 부끄러웠다. 용납하여 주셨다. 스스로 “막가파”라고 말씀하실 만큼 용감하셨으나 착하셨다.

김목사님은 여러 종류의 국내외 모임에 자주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도 가방은 늘 친히 들고 다니셨다. 여비도 마련하여 주셨다. 여행 중에 휴대하시는 가방은 참 간단하셨다. 나도 배워서 여행 가방이 간단하다. 세관 검사할 것이 없으니 귀국 때 제일 먼저 공항을 빠져나가곤 한다. 천국 여행길에 큰 가방이 필요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가방이 많거나 크면 출입국이 복잡하다. 천국 여행은 작은 가방도 필요 없을 것이다.

김목사님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꼴통 보수의 길을 갔을 것이다. 그는 진보 보수 복음주의 등 다양한 신앙의 사람들과 국내외적으로 폭넓게 교류하셨다. 그러나 자신의 개혁주의 신앙은 어디에서나 그 중심을 잃지 않으셨다고 생각한다. 타 종교인들과도 교제하셨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은 흔들림이 없으셨다. 그런 모임에서 오히려 주도적이셨다.

나는 김목사님을 만나 학교에서는 교회사를, 목회 일선에서는 선교, 나눔을 생활에서는 사랑, 관용을 배웠다. 어려울 때 자문을 구하였다. 그는 언제나 기도하여 주셨다. 그는 나에게 인생의 나침판 역할을 해 주셨다. 그럼에도 온전히 그 길을 따르지는 못한 나의 불충함이 못내 죄송할 뿐이다.

이수환 목사(강변교회)

목사님께서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포함하여 여러 기관을, 그리고 한국 교회를 포함하여 여러 선교지를 다니시며 세계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탁월한 교회사 신학자로서 귀한 가르침을 남겨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합동신학교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책은 모든 교파의 신학교와 신학생들이 함께 읽는 책이었으며, 목사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세워진 목회자의 수는 셀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목사님은 강변교회의 목회자이셨습니다. 한평생 강변교회를 사랑하셨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으며, 교회를 통하여 모든 사역을 이어 가셨습니다. 성도들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 온 힘을 다하여 말씀과 경건, 믿음의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교회에 오실 때마다, 성도들을 끌어안으시고, 선물을 주시고, 이야기를 주고받으셨습니다.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할아버지처럼 모든 성도를 대하셨고 그래서 따뜻하고 온유한 사랑이 온 교회 안에 흘러넘쳤습니다.

목사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가장 귀한 유산 역시 ‘교회’라고 믿습니다. 주님의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 주님의 몸으로 살아 있는 교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바로 그 교회입니다. 목사님께서 평생 복음을 전하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요? 은퇴하신 이후에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목사님께서 어떤 비전을 품으시고, 어떤 사명으로 그 길을 걸어가셨을까요? 바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곧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어,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믿음으로, 성령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바로 그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교회들이 더욱 튼튼히 서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길을 목사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걸어가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김명혁 목사님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이어갈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발인예배 설교 중에서)

허태성 선교사(만노그리스도교회)

제가 목사님의 얼굴을 먼발치에서나마 처음으로 뵌 것은 약 40년 전입니다. 목사님은 ‘나사렛형제들 원단금식기도회’에 오셔서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성결한 삶”이란 주제로 강의하셨습니다. 많은 감명을 받았던 그날의 기억은 제가 1988년에 합동신학교를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합신에 입학해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고, 졸업 후에도 목사님과의 관계는 지속되었습니다.

1990년 5월에, 제가 공주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자 목사님께서는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는 ‘후원교회 담임목사와 개척교회 목사’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1월부터 강변교회의 부목사로 일하게 되면서 저와 목사님과의 관계는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매일 목사님과 한 공간에서 동역하면서 목사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었는지 모릅니다. 그 기간에 강변교회는 청담동 시대를 마감하고 도곡동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1999년 9월 제가 은곡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어 목사님과의 관계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2008년 1월 목사님의 후임자가 되어 강변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목사님과는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목사님을 멀리 떠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21세 때 드렸던 선교의 서원을 기억하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저를 선교사로 부르시고 일본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목사님과 저와의 관계는 ‘파송교회의 원로목사와 파송선교사’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2022년 1월 제가 만노그리스도교회의 주임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었다고 목사님께 메일을 드렸더니 곧바로 축하와 격려의 답장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허태성 목사님에게 하나님의 도우시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허태성 목사님과 가정과 사역에 평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이 못난 제자를 위하여 매일 기도한다고도 쓰셨습니다. 아마 지금은 천국에서 기도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인생의 40년간 저의 스승으로서 저의 아비로서 저를 키워주신 김명혁 목사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인 선교칠도(宣敎七道)를 실천하면서 선교하다가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에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기도합니다!”

황규민 장로(강변교회)

목사님, 우리 목사님! 지난 주일 갑작스런 사고 소식을 접하고 또 장례절차를 진행하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목사님과 함께 했던 순간들, 기억들, 사건들이 제 머리를 휘어 감습니다.

늘 닮고 싶었던 우리 목사님, 강변교회 내에서 드럼과 일렉 기타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던 그 시절, 무작정 목사님을 찾아가 잔뜩 긴장한 채, 사춘기 청소년들의 신앙을 위해서는 또래 집단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밴드 찬양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너무도 흔쾌히 허락하시며 오히려 “청소년을 육성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노력해 보자고 격려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함께 중국 연변의 조선족을 방문하던 중에 뜻하지 않은 상황들이 발생하자,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유연하게 대처하며 담대히 풀어나가시던 목사님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목사님은 언제나 신앙의 본질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으셨지만, 시대의 변화와 흐름, 현실의 상황을 절대로 무시하지는 않으셨지요. 역사신학자다운 팽팽한 긴장감, 균형감, 현실감…. 바로 그런 목사님을 무척이나 닮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은 목사님! 운전 문제로 제가 목사님 댁을 방문했던 그날을 기억하시나요? 결국 목사님의 고집을 꺾지 못한 채 물러나야만 했었지요. 목사님 댁을 떠나올 때 목사님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면서 제 손을 꼬옥 잡아 주셨지요. 그리고는, “내가 황 장로 마음을 왜 모르겠어, 하지만 아직은 남에게 운전을 맡길 정도는 아니야. 필요하면 내가 먼저 말할게” 지금도 그 눈빛, 그 손길, 그 음성이 귀에 쟁쟁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강변교회를 위해 날마다 기도하신 우리 목사님, 장례 절차가 진행되는 3일 내내 저는 너무나 분명하게 응답되는 은혜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강변의 울타리를 거쳐간 모든 가족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해외에서 한걸음에 달려왔고, 또 전 교인이 누구랄 것 없이 작은 틈새 하나까지 메우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으며 질서 있게 규모있게 치른 장례에 모든 것이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영원한 스승 김명혁 목사님! 제 기억 속의 목사님을 저는 주저 없이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복음 증거하라고 장사밑천으로 맡기신 마지막 한 톨까지 아낌없이 쏟아붓고 미련 없이 이 땅을 떠나가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늘 계산이 앞서고 몸부터 사리던 제가 목사님을 만난 지도 어느덧 30년 가까이 흘렀네요. 새삼 목사님의 영정 앞에서 강변교회를 섬기는 성도의 한사람으로서 스스로 돌아보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져 봅니다.

누구나 뜻하지 않은 시각에 주님의 부름을 받아 홀연히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늘 깨어 근신하겠습니다. 정암도 걸어갔고 목사님도 걸어가신 바로 그 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을 따르는 그 길’을 저도 역시 따르고자 애쓰겠습니다. 목사님의 본을 따라 저 또한 마지막 한 톨까지 아낌없이 이 땅에 쏟아붓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천국에서 목사님을 다시 뵐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사랑하는 김명혁 목사님! 그때까지 주님의 품에 안기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