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27] 사건과 함께: 꼴리뉘의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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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꼴리뉘의 피살

파리 루브르교회 꼴리뉘 기념상

 

자정을 넘긴지 얼마 안 되는 새벽에 꼴리뉘의 침실에 자객들이 들이닥쳤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원근에서 다급하게 들려오는 비명소리들이 꼴리뉘의 귀를 찔렀다. “당신이 꼴리뉘인가?” 물으며 가슴팍에 칼을 겨눈 자는 붉은 머리라고 불리는 보헤미아 출신이었다. 꼴리뉘(Gaspard de Coligny, 1519-1572)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는 자객들을 향해 “젊은이들, 노인에게 예의를 갖추게나”라고 말했다. 순간 신원을 확인한 자객들은 꼴리뉘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어 칼과 창으로 찌르고는 그의 시신을 이층 창밖으로 내던졌다. 길거리에는 앙리 기즈가 꼴리뉘의 시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꼴리뉘가 무참하게 피살된 것은 역사에서 ‘바뗄레미 대학살의 날’이라고 부르는 1572년 8월 24일 새벽이었다.

그날 새벽 루브르 궁과 록세루와 성당의 종소리에 맞추어 파리의 모든 가톨릭 성당이 일제히 종을 울렸다. 위그노 학살을 주도하는 국왕 샤를르 9세, 모후 까뜨린느 메디시, 그리고 기즈 가문과 가톨릭 귀족들이 루브르 왕궁에 모여 있었다. 한밤중이지만 왕군은 거리마다 대기하였고, 가톨릭 사람들도 학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위그노들의 주택이나 숙소에 들이닥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 길거리에는 위그노 시신들이 무더기로 쌓이기 시작하였다. 쌓을 수 없는 시체들은 수레에 실어 파리 밖으로 이동시키거나, 세느 강에 처박아 떠내려가게 하였다. 세느 강 하류에 있는 위그노 거점도시 루앙에 경고를 주려는 목적도 곁들여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하룻밤에 3천 명에서 1만 2천 명이나 죽임을 당한 바뗄레미 대학살은 위그노 지도자 꼴리뉘를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꼴리뉘는 위그노에 가담한 후 깔방과 여러 번 서신을 교환하면서 신앙을 굳혀 나갔다.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자 꽁드 왕자와 함께 위그노를 지휘하였고 꽁드 전사 후에는 총사령관으로 세 차례 전쟁을 이끌던 꼴리뉘가 많은 위그노 귀족들과 함께 파리에 온 것은 가톨릭과 위그노의 갈등을 봉합할 정략으로 추진된 결혼예식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가톨릭 쪽에서는 국왕 샤를르 9세의 여동생이자 모후 까뜨린느의 딸인 마르그리뜨가 신부가 되었고, 위그노 쪽에서는 나바르 여왕 쟌느 달브레의 아들 앙리가 신랑이 되었다. 결혼식을 두 달 앞두고 쟌느가 의문사한 상황에서 1572년 8월 18일 혼인예식은 강행되었다. 당연히 위그노 지도자 꼴리뉘도 앙리의 혼인을 축하하러 파리에 온 것이다.

10년 전 1562년 3월 1일, 바씨 학살로 전쟁의 불을 댕긴 프랑수와 기즈는 일 년쯤 지나 위그노 귀족 뽈뜨로에게 피살되었다. 뽈뜨로는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암살의 배후 인물로 꼴리뉘를 언급하였다. 꼴리뉘는 이 사건 연루를 부인하였지만, 기즈 가문은 복수를 가슴에 품었다. 특히 프랑수와 기즈의 아들 앙리는 호시탐탐 꼴리뉘를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 꼴리뉘가 결혼식을 축하하러 제 발로 파리에 들어선 것은 앙리 기즈에게는 원한을 갚을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앙리 기즈는 모후 까뜨린느의 도움을 받아 꼴리뉘 살해를 재가하라고 국왕 샤를르 9세를 협박하였다. 국왕은 꼴리뉘를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협박을 못 이기고 고개를 끄떡하고 말았다. 꼴리뉘의 숙소에 들이닥친 앙리의 측근들은 무참하게 살해한 시신을 이층 창밖으로 내던졌고, 밖에서 기다리던 앙리가 꼴리뉘의 얼굴을 확인하자 아이들이 시신을 처참하게 훼손하여 끌고 다니다가 세느 강 물속에 처박았다. 이후 목 베인 머리는 모후에게 전달되었고 염장한 다음 로마의 교황에게 보내졌다. 몸통은 몽포송 사형대에 매달렸다.

꼴리뉘의 죽음으로 위그노는 가장 큰 정치 지도자를 잃은 셈이 되었다. 바뗄레미 대학살에서 꼴리뉘와 함께 위그노 귀족들도 대거 희생되었다. 그들이 가톨릭의 적대적 태도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은 큰 실책이었다. 꼴리뉘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위그노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한 소수집단으로 떨어졌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