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26] 사건과 함께: 깔방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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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깔방의 죽음

“아….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위그노라면 깔방의 부고를 접하고 이런 감정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를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기에 모든 면에 위그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깔방이 숨진 그날, 후계자인 베자는 교회를 도우라고 이 땅에 보내주셨던 가장 큰 별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말했다.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누와용에서 출생한 깔방은 소년 시절 파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오를레앙과 부르쥬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청년기에 들어섰다. 인문주의 교수들의 사상의 영향, 신교 운동과 박해의 목격, 성경을 읽고 가톨릭 미신에서 떠나라는 육촌 올리베땅의 권유로 깔방은 서서히 종교개혁 이념에 물들어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하였다. 깔방은 친구 꼽의 파리 대학 학장 취임 연설에 루터 사상을 써준 인물로 지목되어 파리에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깔방은 올리베땅 성경에 두 서문을 작성하고, 국왕 프랑수와1세에게 신교를 변호하는 서신을 헌사하고, 성경적 기독교를 확실하게 밝히는 기독교강요를 저술함으로써 신교의 젊은 기수로 두각을 드러냈다.

1536년 7월, 깔방은 스트라스부르에 가는 도중 제네바에서 유숙하였는데, 제네바 개혁을 시작한 파렐이 찾아와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강하게 요구한 것을 못 이겨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깔방은 엄격하게 문답서와 치리를 시행하다가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거기에서 깔방은 재세례자 과부 이들레뜨와 결혼하였고, 궁정시인 마로와 함께 22곡을 담은 “시편과 노래”를 출판하였다. 1541년, 러브콜을 받아 제네바로 돌아온 깔방은 교회규범과 문답서 개정판을 펴내 개혁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이후 10년은 깔방에게 고난의 시기였다. 기독교인의 자유를 자유생활로 이해한 “자유주의자”들과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제네바 시의회석(市議會席))을 다수 확보하여 깔방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강아지의 이름을 ‘깔방’이라고 부를 정도로 깔방을 혐오하였다. 예정론을 비판하는 자들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삼위일체론 비판하여 신구교를 막론하고 반대를 받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불법 입국하다가 체포되어 파렐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555년, 자유주의자들이 참패하면서 깔방은 마지막 10년 동안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으로 잠시도 잊은 적이 없는 프랑스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위그노 교회를 확산시켰다.

1564년에 들어서면서 깔방은 아주 쇠약해졌다. 마지막 여러 해 동안 투병생활을 했지만, 이번에는 악화된 모습이 눈에 띌 정도라 2월 초부터는 교회 설교와 아카데미 강의를 중단하였다. 부활주일 성찬예배에 혼신을 다해 참석한 이후 병색은 극도로 심해졌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낀 깔방은 4월 25일 유서를 작성하여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분배하였다. 10퍼센트를 기부금으로 돌리고, 나머지는 조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4월 27일, 깔방은 25인회를 집으로 불러 작별 인사와 함께 권면의 말을 남겼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시기에 하나님의 날개 아래 숨어야 한다는 권면이었다. 4월 28일에는 목사회를 불렀다. 깔방은 제네바에 도착한 이후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을 꺼내고는 자신의 성품을 잠시 설명하였다. 자신은 늘 초라하고 소심한 사람이며, 나면서부터 많은 결점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파렐이 깔방의 마지막 얼굴을 보러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뇌샤텔에서 왔다.

1564년 5월 27일, 깔방은 55세를 일기로 길지 않지만 정말 위대한 생애를 마쳤다. 깔방의 장례는 유언에 따라 매우 간소하게 치러져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덤을 찾으려고 해도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깔방의 사후에 프랑스 위그노에게 어둠이 밀어닥쳤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다른 별이 빛을 비추도록 앞으로 40년 이상 활약할 베자를 준비해두셨기 때문이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