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팔츠(하이델베르크) 교회의 장로회 정치체제 평가와 한국교회(上)_이남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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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츠(하이델베르크) 교회의 장로회 정치체제 평가와 한국교회(上)

이남규 교수(합신 조직신학)

 

16세기 중반 통치자가 한 지역을 다스리던 때에 장로회 정치원리가 도입된다는 것은 갈등을 의미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작성한 이후 팔츠교회에는 장로회 정치 체제 도입 때문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주저자인 우르시누스와 《팔츠교회법》의 주저자인 올레비아누스와 같은 걸출한 개혁신학자들이 갈등의 한 편에, 그리고 에라스투스가 다른 편에 있었다. 이 에라스투스는 17세기 중반 유명해지는 단어 ‘에라스투스주의’의 기원이 되는 바로 그 에라스투스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지던 때 스코틀랜드의 신학자들은 정부의 통제 아래 교회를 두려는 에라스투스주의와 싸워야 했다. 길레스피의 유명한 책 《아론의 싹난지팡이》는 에라스투스주의를 반대하기 위해서 쓰였다. 17세기 장로교주의자들과 에라스투스주의자들이 싸움이 있기 전 유사한 논쟁이 이미 1560년대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있었다. 이 갈등을 살피는 일은 장로회 정치체제의 독특성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 시대의 장로교회의 약점을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교회권징에 대한 다른 관점

팔츠교회가 개혁주의의 길을 가기로 한 후 필요했던 중요한 수단은 신앙교육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와 이 교리를 적용하고 실천할 《팔츠 교회법》이었다. 1563년에 나온 이 두 문서를 통해 개혁주의는 견고하게 서 갔다. ‘교회권징’에 있어서도 이 두 문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82문에서 “고백과 생활에서 불신과 불경건을 나타내는 자들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묻고, “하나님의 언약을 더럽히는 자들이므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명령에 따라서 교회가 ‘열쇠의 직무’를 통해 생활을 돌이킬 때까지 성만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답한다. 이 열쇠의 직무인 교회 권징을 다루는 83문은, “여러 번 권고에도 생활과 고백을 고치지 않는 자들이 교회 또는 교회에 의해 세워진 자들에게 보고되어야” 하고, “권면을 듣지 않으면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교회에 의해 세워진 자들의 결정을 단순히 교회의 결정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으로 말한다. 1563년 11월 15일에 발표된 《팔츠 교회법》도 성만찬 참여에서 제외시키는 교회 권징의 주체에 대해, “한명이나 몇 명의 교회사역자나 다른 사람들의 권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각 지역에서 형편과 필요에 따라서 자비로우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얼마가 피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말씀의 종과 함께 권징을 행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교정을 약속하고 보일 때까지 성찬 참여가 금지되고 교회로부터 분리된다고 정한다.

그러나 1564년의 《교회위원회 규정》(Kirchenratsordnung)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와 《팔츠 교회법》의 교회 권징과 다른 점을 말한다. 《교회위원회 규정》은 교회 권징이 국가권력과 구분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는 국가권력과 교회권력이 함께 협력하도록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국가권력에 귀속되도록 정했다. 예를 들어, 만일 자기 직무를 소홀히 하는 관원이 있다면 목사가 경고하고 이 경고는 상급관청에 보고되며,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생활이 악한 교회회원의 경우 목사에게 경고를 받을 뿐 아니라 관원에 의해 경찰법에 따라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일들이 효과가 없게 되면 최고 권력자인 선제후가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 교회가 하는 역할이란 선제후의 출교 결정을 설교단에서 선언하는 일이다. 《교회위원회 규정》은 실제적인 실행에 있어서 경찰업무가 우위에 있으며, 국가권력이 최종적이며 실제적 결정을 하도록 되어 있다. 정교분리를 인식하였던 올레비아누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교회위원회 규정》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에라스투스는 이 규정을 마음에 들어 했다.

갈등과 발전

그리고 두 진영의 갈등 폭발이 있었다. 1568년 6월 10일 위더스라는 학생이 학위를 청구하기 위해 발표한 논제에 대한 공개토론에서 “목사들이 장로와 함께 죄를 범한 누구라도 곧 왕들까지도 고발하고 책망하고 출교하고 교회 권징을 위해 관계된 다른 것들을 시행할 권한을 가질 뿐 아니라 실행한다”라고 발표했다. 에라스투스는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였고 처음에는 103개의 논제로 자기의 생각을 밝혔고, 다시 이것을 75개의 논제로 정리했다. 이 내용이 출판되자 에라스투스주의자들의 교과서가 된다. 핵심적인 쟁점은 ‘교회의 치리권’이 어디에 귀속되는가 하는 점이다. 에라스투스는 교회 권징을 행사하는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당시 국가의 모습은 기독국가(res publica christiana)이므로 교회와 국가는 한 체제 아래에 있다. 이제 문제는 이 체제의 머리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이다. 만일 제네바 방식을 따른다면 이 기독국가 체제의 머리는 교회며, 치리를 행사하는 목사와 장로들에게 실질적 권력이 돌아간다. 에라스투스에게 이 모습은 중세 때 교황이 세속권력을 자기 아래에 두는 모습과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잘못된 모습이기 때문에 에라스투스는 기독국가의 머리가 바로 이 국가의 행정부에 돌아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독국가의 교회를 구성하는 회원의 무리와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무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제 에라스투스는 마태복음 18:17의 “교회에 말하라”를 그 무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말하는 의미로 해석하여서 ‘교회에 말하라’는 ‘산헤드린에 말하라’가 된다. 그리고 에라스투스 당대의 의미로 말한다면, ‘공직자들에게 말하라’이며, 이 때 공직자는 교회가 뽑지 않으므로 최종적으로 ‘시의회에 말하라’가 된다.

올레비아누스와 신학부 교수들은 산헤드린이 ‘국가에 속했다’는 에라스투스의 의견에 반대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는 말씀에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여기라는 말이다. 여기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는 일은 국가의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이다. 이 말씀에서 세리는 국가의 일을 하는 자로서 공직에 속해있으나 교회의 일원이 아니다.

경건했던 선제후의 마음은 귀족과 권력가들이 아니라 신학자들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귀족들과 에라스투스의 반대에도 1570년 7월 13일 《교회 권징령》이 반포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비로운 얼마의 사람들을, 곧 교회의 형편에 따라 4명이나 6명이나 8명을 뽑아야 했는데, 경우에 따라서 의회와 법원과 교회에서 뽑도록 했다. 장로가 참여하는 회의에 의한 권징의 방식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지만 아직 교회가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었다. 수찬금지나 출교라는 결정은 선제후 곧 국가권력이 갖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에라스투스의 반대를 아직 완전히 이기지 못한 것이다.

이 《교회 권징령》은 인접 지역의 8-9개의 목사관구에 있는 목사들이 한 달에 한번 씩 모여 신학적 질문을 살피라고 함으로써 이 모임이 신학 재교육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또 이 모임에서 목사 개인의 교리와 생활이 점검되도록 했는데, 이것은 제네바 교회의 목사회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사들이 점검받는 다는 의미에서 시찰회의 성격이 있다.

이후 팔츠교회는 계속해서 발전을 보여준다. 1571년에 《당회의 직무》(officium presbyterium)란 규정을 마련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매주 오후 예배 후에 당회가 모이며, 교회가 잘 세워지도록 회의를 하고, 매 회의 때 회의록이 작성되며, 다음 회에 다시 읽혀지도록 했다. 게다가 교회 권징에 대해서도 당회가 주도적으로 실행하도록 되어 있다.

같은 해에 쓰여진 소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목사와 신학자들의 보고서>에는 장로회 정치체제의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당회-목사들의 4주에 1회 모임-직무모임(Amptsversamlung)-총회’라는 4 단계의 회의체제가 나타나며, 그래서 개혁교회의 체제 즉 당회(Presbyterie)-구회(노회)(Klassenkonvente)- 지역회(Provinzialsynode)-총회(Generalsynode)의 체제와 유사하다. 그러나 아직 팔츠에는 관이 주도하는 ‘교회위원회’(Kirechenrat)가 팔츠교회의 중심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교회와 목사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여전히 공국의 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교회위원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른 지역의 개혁교회가 팔츠교회와 논의할 때도 공식적으로는 교회위원회와 논의해야 했으며, 지역회의 성격을 갖는 직무모임도 회의 중 선출되는 의장이 이끌지라도 회의의 주선자는 공식적으로 선제후가 임명하는 감독(Superintendent)이었다. 16세기 팔츠 개혁교회는 아직 두 체제, 즉 교회 자체 내의 회의체제와 공식적으로는 관이 주도하는 체제가 함께 하는 방식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