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21] 위그노 이야기 21 사건과 함께: 위그노 제1차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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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위그노 제1차 총회

 

위그노의 초대 총회 장소(현재)

 

1547년 위그노 첫 교회(모)가 시작되어 14명의 순교자를 낸 후,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프랑스 전국 여기저기에 하나둘씩 위그노 교회들이 세워졌다. 쟝자끄 거리 사건이 1년 반 지난 시점에는 수십 개의 교회가 도처에 설립되었다. 위그노들은 계속해서 교회가 더 많이 늘어날 추세를 예상하면서 앞으로 어떤 위상을 가져야 할지 제시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위그노 교회가 견지해야 할 교리와 제도를 설정할 필요였다.

1559년 5월 25~29일, 국왕 앙리 2세의 박해가 절정으로 치달리고 있을 때, 파리 센느 강 남쪽에 붙어 있는 한 장소(비스꽁티 거리)에서 위그노들은 제1차 총회를 개최하였다. 겨우 3일 후에 국왕 앙리 2세가 “불타는 방”이라는 별명을 지진 화형 판결부서를 설치하여 위그노들을 색출해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놀랍게도 그런 국왕이 거주하는 루브르 궁전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센느 강 건너 맞은편에서 위그노 총대들이 모인 것이다. 당시 프랑스 전국에는 72개 위그노 교회가 산재하면서 12개의 노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20명의 총대가 파리로 은밀히 입성하였다. 프랑수아 모렐이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한 초대 총회에서 장차 위그노 교회의 방향을 결정짓는 두 가지 귀중한 문서인 신앙고백서와 교회치리서가 작성되었다.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다. 고대 로마 제국 시대로부터 내려온 속령의 이름을 따라 “갈리아 신앙고백서”라고 부르기도 하며, 베자가 의장을 맡았던 제7차 라로쉘 총회에서 인준을 받았기에 “라로쉘 신앙고백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40개 조항으로 된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처음부터 신론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는데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하여,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셋째는 성령님에 대하여, 넷째는 교회에 대하여 고백한다. 결국 프랑스 고백서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와 벨직 신앙고백서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고 독일 여러 도시에서도 승인받았다.

교회 치리서는 교리와 예배와 도덕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위그노의 교회 정치를 보여준다. 치리서는 교회에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활동, 순수한 교리의 실행, 오류 개혁과 억제, 가난한 이들과 난경에 처한 이들의 긴급 지원, 어른과 아이를 교육하는 거룩한 집회의 시행을 강조한다. 치리서는 직분의 사명을 설명한다. 목사는 교리 교육, 장로는 교회 보존, 집사는 빈민 구호를 책임진다. 목사는 복음을 선포(설교)하고, 장로는 교회를 지도하며, 집사는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돌본다. 그런데 신교를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에서는 집사의 직무가 교회에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치리서에 의하면 위그노 교회는 당회, 시찰회, 노회, 총회라는 조직을 가진다. 교회정치에서 가장 큰 특징은 교회와 교회 사이에 그리고 교회의 직원들 사이의 평등성이다. 첫 번째 총회는 처음부터 이 사상을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에 우위 권이나 지배권을 주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 교회의 목사들이 서로에게 그렇게 할 수 없고, 장로들이나 집사들도 서로에게 그렇게 할 수 없다”(제1항). 신앙고백서도 같은 어조로 고백한다. “모든 참된 목사는 같은 권위와 동등한 권세를 가진다.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에 지배나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불법이다. 서로 간의 일치와 형제애를 유지하는 데 모든 조처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제30항).

이런 평등사상은 자연스럽게 두 가지 특징을 낳는다. 첫째로, 교회 직분의 계급주의 반대이다. 이것은 감독(bishop)의 지배 없이 평등한 회의로 이루어진 교회를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의 방종주의 반대이다. 이것은 각 교회가 분립되어 있거나 제멋대로 가지 않도록 노회 안의 이웃교회들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고백이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