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20] 사건과 함께: 생자끄 거리 사건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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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생자끄 거리 사건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 조병수 박사)

 

믿음은 마음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깔방의 주장이었다. 믿음을 삶으로 표현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깔방의 가르침을 따라 파리의 위그노들은 앙리2세의 악랄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동서남북 곳곳에서 은밀한 모임을 가지는 데 힘썼다. 위그노의 모임은 불법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센 강의 시테섬 한복판에서 남쪽으로 파리 성곽 근처를 향해 내려가다 보면 생자끄거리가 나온다. 이 거리의 한 주택에서 위그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빵과 포도주로 성찬을 나누었다. 여기에는 평민들뿐 아니라 귀족들도 참석하였다.

당시 위그노를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극악한 이단으로 여기고 있던 가톨릭 사람들 사이에는 위그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위그노는 성적으로 문란한 집단으로 비밀모임에서 근친상간을 일삼는다는 소문이었다. 근친상간 비난은 기독교 초기로부터 비밀모임을 공격할 때는 언제나 등장했던 단골 메뉴였다. 가톨릭 사람들은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는 사실무근인 소문에 근거하여 위그노의 비밀모임을 의심하며 폄훼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생자끄 거리에는 이런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위그노들이 성경을 배우고 설교를 듣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1557년 9월 4일, 여기에는 3백 명 정도의 위그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맞은편 뒤쁠레씨 대학에 다니는 사제들이 길을 건너다가 이 집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위그노들이 예배를 마칠 즈음 가톨릭 사람들이 대학 창문에서 큰 돌을 던졌고 무장한 광신 무리가 공격을 가하면서 난입을 시도하였다. 마침 칼을 소지한 위그노 귀족들이 방어하면서 도피구를 연 덕분에 많은 수가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130명 정도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대부분 두려워서 집안에 남아있던 여성들과 아이들을 비롯한 노약자들이었다. 그 가운데 스무 명 정도는 귀족 출신 여성들이었다.

1557년 9월 27일, 일곱 명이 정죄되었다. 거기에는 변호사 그라벨, 교사 끌리네, 그라브롱 영주의 보르도 출신 23세 부인 필리뻬가 포함되었다. 필리뻬의 남편 그라브롱 영주는 파리 교회의 장로였는데 4개월 전에 한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녀 위그노 신앙을 독실하게 견지하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남편이 운명할 때 가톨릭 사제를 부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개혁파 신학이 가르치는 평등사상을 확립하고 있었던 까닭에 귀족 남편을 가난한 사람들 틈에 매장하였다. 그라브롱 부인의 재산을 노리는 파리 대법원장의 아들은 생쟈끄 거리의 예배 참석했다가 체포된 그녀에게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선고를 받게 했다.

그라브롱 부인은 곱게 자란 부유하고 우아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벼룩에게 뜯기거나 태양에 그을리는 고통을 이겨낼 자기 능력을 스스로 의심하여 순교의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하나님께 늘 기도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라브롱 부인은 모베르 광장의 화형대로 당당하게 나아갔다. 그녀는 화형대로 걸어가면서 과부의 옷 대신에 마치 신부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것처럼 벨벳(비로드) 모자로 치장하기를 요청했다. 처형대 위에서 그라브롱 부인은 동료 신자 한 사람의 겁먹은 모습을 보았다.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가 혀를 자르게 내밀라고 명령하자 동료 신자는 두려워 떨면서 이단 판결에 이런 고문까지 주문되지는 않았다며 거부하였다.

그라브롱 부인은 하나님께 면류관을 받을 순교자가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동료 신자에게 말하였다. “여보세요. 형제님, 당신을 위해 몸과 영혼을 희생한 분께 혀를 드리는 것을 왜 거절하십니까?” 그리고 사형집행인에게 말했다. “친구, 와서 내 혀부터 자르세요.” 그라브롱 부인은 혀를 베인 후 교수형을 받았고, 결국 화형을 당했다. 그라벨과 끌리네는 산 채로 불살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