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의 위치와 장로교 정체성 회복의 필요성
< 가정호 목사, 세대로교회 >
“우리 헌법에 명기된 대로 장로교회다운 신앙의 실천을 먼저 점검해야”
“신앙고백과 총회 소집문에 입각하여 믿음의 승리 구하는 기회 삼기를”
“우리가 저들보다 나은게 무엇이냐? 바로하겠다고 나와서 뭘 얼마나 바로했나?”
이 말은 이번 총회중에 의장에게 언권을 얻어 발언자로 나선 한 총대께서 의견을 개진하기 전에 던진 질문이었다. 사실 그의 이 과격한 발언은 단지 그분만의 발언이 아니라 고뇌에 빠진 합신 사역자들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기도 하다.
단순히 타교단과 비교우위를 통해 그들보다 조금 나은 부분이 있어 어떤 자부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이라면 이는 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원로가 된 박영선 목사님께서 수시로 도전하는 “우리가 뭘 얼마나 바로 했는가?”라는 이 질문은 깨끗하고 바른신학, 바른목회, 바른 생활을 실천한다고 외쳐온 우리가 이 땅의 교회들을 얼마나 바른길로 인도했는가에 대한 자책성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들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 우리가 저들보다 뭔가 좀 낫다면 그게 어떤 의미인가? 그래서 합신 총회는 교회의 순결성과 신학의 정통성을 회복시키고 또 그것을 지키는데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가?
- 시급한 장로교 정체성 확립
총회 안에서 우리 내부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일들, 이를테면 우리 헌법에 명기된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신앙고백서와 대소 교리문답, 예배모범)를 근거로 한 목회가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다루는 문제들을 제쳐둔 채 합신 총회와 이대위가 누군가를 이단으로 결정하는 자리에 서슴없다는 점을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며 성도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파멸에 이르게 하는 명징성이 드러난 집단에 대한 이단 판정은 시급하게 실행해야 할 일이다.
합신 총회 산하에 이미 두날개 선교회의 교회 체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접목하고 있는 교회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이 단체를 99회와 100회기 두 번의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자는 말은 한국교회의 정황과 형편에서 지나친 단순함이 아닐까? 그렇게 하기로 한다면 이 땅에 19세기 경건주의나 웨슬레주의 영향으로 파생된 오순절 신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교회들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한 개혁교회 연구가는 “한국교회는 모두 이단성이 있다”는 냉소적인 중얼거림이 늘 필자의 뇌리에 맴도는 것은 그의 비명 같은 외침이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두날개 선교회가 이단성이 명백하다면 거기에 참여한 교회들을 단번에 치리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결정이 아니냐고 서슬 퍼렇게 힐문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두날개 선교회가 정확하게 이단이라면 원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우리와 다른 신학이나 심한 혼합주의에 빠진 일련의 단체들에 대하여 급거히 이단판정을 내릴 만큼 당당한가? 그러기 전에 우리 총회는 합신소속 지역교회들이 헌법에 명기된 대로 장로교회다운 신앙의 실천에 대하여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교회들의 신학실천현장의 심각한 문제들을 명백하게 증명해 내는 일이 전제되지 않고 우리 이웃들의 신학이 가진 이단성에 대하여 시시비비하는 일은 우리자신이 공격을 당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 두날개 보고서에 대한 총회 결의
이번 100회 합신 총회 산하기관인 이단대책위원회가 이단성이 의심되는 단체나 교회들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 온 기관임을 확인하였다. 총회회원들은 이대위의 수고와 노력에 대하여 신뢰를 보냈다. 그리하여 이대위가 보고한 안건들을 총대들은 높은 긴장수위를 유지하며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의논을 하여 최선의 결론을 내렸다.
꼭 총대가 앞에 나와 발언되어진 부분만이 의논의 전부는 아니다. 한 총대는 이대위의 조사 결과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어떤 단체나 교회의 이단성을 검토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우리의 헌법에 명시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어떤 조항에 얼마나 어긋나는 점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옳다. 이는 이대위의 연구물에 대한 적절한 지적이며 올바른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회원은 1981년 제66회 총회 소집시 결의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총회 소집문 제 1,2,3,4항에 근거하여 매회 총회가 올바르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냉정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참으로 옳은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에게 편리하게 해석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번 합신 총회의 결의가 세계비전 두날개 프로세스에 대한 이단성에 대하여 면제부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언론이나 다양한 뉴스매체에서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결의된 내용을 스스로 폄훼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합신 총회는 두날개 선교회에 대한 조사연구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그 선교회가 주장하는 내용들의 심각성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것은 이미 문서화된 결의안에 담겨져 있다.
“총회에 소속한 모든 교회에 대해서 신앙교육의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총회가 확인하고, 더욱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고 승리할 것을 간절히 구하는 기회로 삼기로 하다.”
이 결의안은 결코 두날개 그룹에 면제부를 부여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있거나 이웃 교단과의 갈등을 피하려고 분칠한 것이 아니다. 이 안에는 중대한 내용을 함의하고 있다.
- 총회 결의안에 담긴 의미
“신앙교육의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내용은 신학적 깊이가 너무 빈약하여 깊이 있는 균형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신앙교육의 심한 불균형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큰 문제가 야기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몸통을 지지해 주는 두 날개에 균형을 심하게 잃으면 추락한다. 두 날개가 급거히 균형회복을 시도하지 않으면 추락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인 셈이다.
애써 부연하면 “신학적 깊이가 절실히 요구된다”라는 말은 신학적인 고민이 너무 얕아서 도무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대로 두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된다는 말이다.
“그 운동에 신학적인 균형이 절실하다”는 말은 균형 회복이 안 되면 필경은 추락할 것이니 결과적으로 양떼들이 생명을 잃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전체 문구 중에서 “절실하다”는 말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절실하다는 말은 그저 조금만 회복되면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이 회복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고 믿음이 승리할 것을 간절히 구하는 기회로 삼자”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들을 의존하는 잘못된 의존성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개혁을 추구하는 총회 소집의 근거 조항에 입각하여 믿음의 승리를 구하는 기회로 삼자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총회에서 자기의 의견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인내함으로 사랑을 더하여 진리를 말하며,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번 총회에서 고뇌하는 총대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총회에 참석한 일원으로 적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 마치는 말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100% 정합성을 가진 결론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더 분명하고 명징성이 높은 수준의 판정과 결과물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겠다.
그러나 합신이 이단 판정을 하는데 있어서 발 빠르게 움직이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바른 신학을 수호하고 무엇이 장로교회의 정체성에 근거를 둔 교회인가에 대한 정통성을 세워가는 일에 더 안타까워하고 호소하는 일이 절실할 것이다. 이단을 명징성 있게 가려낼 정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논쟁은 의미 없는 말다툼의 반복일 뿐이다.
우리 합신교단이 역사적 전통에 입각한 장로교와 개혁신학을 더 깊이 있게 드려다 보고 그 올바른 신학을 목회에 치열하게 적용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른 신앙을 드러내는 일에 쓰임받기를 격렬하게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