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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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은 이유

 

아는 대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사람은 아는 대로 살지 않고 익숙한 대로 사는 존재인 것 같다. 애굽의 400년은 광야 40년으로도 잘 벗겨지지 않는 법이다.

신학적 회심이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정서적 회심이다. 신학적 실천이 이뤄지는 곳이 우리 삶의 자리인 정서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회심 안에는 이 둘이 다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진정한 회심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달라졌다면 그것이 몸에 익을 수밖에 없다. 몸에 익지 않은 지식은 결국 그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운동이나 운전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이론을 따라 하지만 나중에는 몸에 익은 대로 반응하게 된다. 예컨대 수영 교본을 100권을 독파해서 수영에 대해 이론적인 마스터를 하는 것과 실제 물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다.

곧 신학적 회심이 이론적 변화라면 정서적 회심은 이 이론적 변화가 몸에 베이게 되는 변화를 일컫는다.

실존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키에르케골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자신의 신학에 거하지 않는 젊은 신학자를 논하는 장면이 어쩌면 현대인의 실존의 위기이자 기독인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수많은 책들에 갇혀 현장을 잃어버렸다. 성도, 곧 거룩한 무리라 부르는 이유, 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은 이유가 우리의 신학적 회심이 정서적 회심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의 현장은 교회이고 교회는 공동체의 산실(産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공동체 성을 상실했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모여서 설교를 듣고 점심 먹고 성경공부 하나 정도 참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성도의 교제라 할 수 있는 철이 철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친구의 얼굴을 더욱 빛나게 하는 그런 진정한 형태의 만남이 사라진 것이다.

걸음마를 이론으로 배운다고 되지 않는다. 엄마와 가정의 품에서 무한 실패를 경험하면서 습득한다. 성도의 성화도 교회라는 어머니의 품에서 무한 실패를 용인받으면서 일곱 번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여덟 번째의 의로움인 것이다.

교회가 이것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음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