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18] 사건과 함께: Jean Calvin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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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함께: Jean Calvin의 등장

깔방의 옥탑방

 

깔방(1509~1564, 우리나라에서는 칼빈 또는 칼뱅이라고 부름)을 빼놓고 위그노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팥소를 빼놓고 팥빵을 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위그노 운동은 깔방이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뿐 아니라 그의 사후에도 절대적으로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개비가 옷 속에 스며들 듯이 활동 초기부터 깔방의 인격과 경건과 학문은 위그노 운동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만큼 깔방은 위그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것이다. 깔방은 새 교회를 조직하고, 세속정부와 협상을 벌이고, 개혁파 신학을 정교화하는 데 힘을 쏟는 동안에도, 가슴에 품은 소중한 목표를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프랑스 동포를 개혁 신앙으로 회심시키는 것이었다.

깔방이 언제부터 종교개혁에 동참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557년에 출판한 시편 주석 서문에서 일대기를 간략하게 서술하면서, 그토록 맹신하던 가톨릭으로부터 “갑작스러운 회심”을 경험했다고 말하는데, 어느 사건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1528년 이미 종교개혁에 가담하고 있었던 육촌 올리베땅이 19세의 깔방을 만난 자리에서 성경 연구와 가톨릭 미신 탈피를 권유한 적이 있다. 이때도 깔방은 선명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24세의 깔방은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을 자기 돈으로 출판하였지만(1533년), 일반적인 인문주의의 주석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이름을 내지는 못하였다. 그것도 종교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깔방을 움직이게 만든 사건은 1533년 11월 1일에 발생하였다. 그의 친구 니꼴라스 꼽이 파리 대학 학장 취임식에서 행한 산상수훈 연설은 에라스뮈스와 루터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그 원고를 작성한 것으로 의심받은 깔방은 자신이 거주하던 옥탑방의 창문을 통해 이웃의 지붕으로 건너뛰어 마침내 파리를 탈출하고 말았다. 이듬해 깔방은 인문주의자들을 보호하며 후원하던 왕녀 마르그리뜨(국왕 프랑수와1세의 누나)의 날개 아래 숨어 지내며 유명한 인문주의 인사들을 만났다. 속설에 의하면, 당시 깔방은 엉굴렘 근처에 있는 마을의 동굴에서 기독교강요를 집필했다고 한다.

왈도파의 주문을 따라 올리베땅은 그 어간에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을 앞두고 있었다. 1535년 2월 12일에 탈고되어 6월 4일에 인쇄를 마친 올리베땅 성경에 깔방은 두 가지 서문을 썼다. 전체 서문에서는 성경의 유일성을 강조하고, 신약성경 서문에서는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을 소개하였다. 깔방은 자기도 모르게 왈도파와 관련을 맺은 셈이 되었다. 깔방이 역사의 무대에 공식적으로 오른 것은 그해 8월 23일로 평가된다. 그 날짜에 프랑수아 1세에게 신교를 열렬하게 변호하는 한 통의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 서신은 이듬해 3월 바젤에서 출판한 기독교강요의 초판 서문에 헌정사로 실렸다. 이 책은 위그노에게 두고두고 신학 지침서가 되었다.

1536년 7월, 깔방은 스트라스부르로 가던 길에 우연히 제네바를 들렀는데 파렐의 강력한 요청으로 제네바 개혁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엄격한 치리 시행 때문에 시의회의 반발에 부딪혀 3년을 못 채우고 추방당하고 말았다(1538.4.24.). 깔방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위그노 난민 교회를 목회하는 중에 독일 신교의 예배방식을 경험하면서 개혁파 예배의 틀을 잡았다. 1539년, 깔방은 끌레망 마로와 함께 장차 개혁파 교회에 표준이 될 시편 찬송을 편찬하였다. 깔방은 여러 번 결혼을 시도한 끝에 자녀가 두 명이나 딸린 재세례파 과부 이들레뜨와 결혼하였다(1540.8.). 이들레뜨는 깔방 곁에서 병자 심방과 위그노 난민 영접 등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9년 만에 생애를 마감하였다.

1541년 9월 13일, 깔방은 제네바로 귀환하여 사망할 때까지 23년간 개혁파 교회를 이끌면서 위그노의 영적 버팀목으로 프랑스에 성경 진리를 투입하였다. 마치 다니엘서에서 사람이 손대지 않은 돌이 신상을 부서뜨리듯이, 제네바로부터 들어오는 복음은 프랑스의 거대한 가톨릭 우상을 무너뜨렸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 조병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