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 총회 100년의 의미와 새로운 출발_남웅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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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신 총회 100년의 의미와 새로운 출발

< 남웅기 목사, 바로선교회 >

 

성공의 금자탑 쌓는데 전념하는 것은 신사참배 같은 부끄러운 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가 마침내 100회를 맞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양합니다. 

사실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는 당시 이미 7개 노회가 조직된 가운데 1912년 9월 1일 평양신학교에서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100회 총회는 마땅히 2012년이어야 하겠지만 3년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잃어버린 3년은 누구나 생각하듯 6.25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 중에도 총회는 대구와 부산에서 어김없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1943년 5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총독부에 의해 강제해산조치 된 탓입니다. 그 이후의 한국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아닌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로인해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42년 제31차 총회이후 중단됐다가, 해방 이후 1946년 남쪽에서나마 제32차 총회를 열면서 그 역사를 잇게 되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뀐 것은 1949년, 제35차 총회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듯이 그 대한예수교장로회가 1951년엔 고신 측과 분리되고, 1953년엔 기장 측과 분리되고, 1959년엔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분리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이던 우리가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으로 구별된 건 1981년도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교단 총회를 35회가 아닌 100회 총회로 기념하는 건,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의 역사엔 조선예수교장로회 역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몇 가지 짚어 볼 게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역사를 공유해야 합니다.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이름으로 100회 총회를 함께 기념하는 모든 장로교단은 사실상 형제임이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근데 본 교단 어디에도 1981년도 이전의 역사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역사, 공유하지 못한 역사, 교단 연혁 속에서도 찾을 수 없는 역사라면 100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국사교육을 포기한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 새삼스럽습니다. 교단의 역사가 살아있을 때 그 미래도 보장될 줄 압니다.

또 하나, 우리는 회복되어야 합니다. 남북이 나누인 것은 한반도 지형만이 아닙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것은 이산가족만이 아닙니다. 교회가 나뉘었고 교회 역사가 찢겨나갔습니다. 나뉜 것은 합쳐져야 하고, 찢긴 건 꿰매야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100회 총회를 기해 우리가 더욱 갈급해야만 할 것은 통일에 대한 열망과 의지라 하겠습니다. 남쪽만의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아닌 통일대한민국을 아우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 대한 절실한 열망이 필요합니다. 온전함을 이룰 때 새 역사가 창조됩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복에의 열망은 하나님도 기뻐하실 일인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교단 총회 역사가 100회에 이른다면, 그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책임도 공유해야 합니다. 1938년도에 있었던 제27차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 문제는 비록 합신 총회와는 무관한 일이지만, 그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무책임할 순 없습니다. 하여 교단차원의 회개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다면 허망합니다.

이미 제32차 총회(1946년)에서 27차 총회결의를 취소한 바 있고,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결의취소만 했었지 참회내용은 없었습니다. 저들이 한낱 면치례(체면이 서도록 일부러 어떤 행동을 함. 또는 그 행동.) 행사로 끝내버린 것은, 당시 교권의 주도자들이 곧 친일 신사참배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사참배는 결국 침략세력, 즉 힘에 의한 굴복사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취한 인간의 힘을 찬양하며, 끝없이 그 성공의 금자탑을 쌓는데 전념한다면 이는 신사참배 못지않은 부끄러움입니다.

그때는 비록 외압에 의한 굴복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의 영광(힘) 앞에 스스로 무릎 꿇는 참담한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교회위기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지금 제마다 바벨탑인 줄 의식도 못한 채 제마다 욕망을 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100회 총회를 맞은 교단답게 그에 합당한 새로운 의지라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건 성공의 길이 아니라 골고다 십자가 길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