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하나님을 배제한 교육_이동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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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배제한 교육

이동열 교수(합신, 기독교교육)

 

초등학교 시간표에는 부모 세대들이 학교에 다닐 때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과목이 있다. 바로 ‘창체’로 창의적 체험활동의 약자이다. 창의적 체험활동은 이전에 CA 혹은 HR로 표기되던 학급 특별활동의 새 이름으로 시간표에 ‘창체’라고 표기하고 부른다. 창체는 자율 활동, 진로 활동, 봉사 활동, 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활동들을 포함하는데, 특히 진로 활동과 관련하여 학생들에게 학생 인권 조례, 자기 결정권, 나다움, 비판 의식, 환경 생태 보호 등을 가르친다.

몇 해 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대중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독어독문학 교수가 나와 한국 교육의 현실과 대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로 인한 한국의 극단적 경쟁 교육의 문제를 통찰력 있게 지적하였다. 그리고 유럽 특히 독일 교육에 한국 교육의 대안이 있다고 언급하며, 현재 한국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 성 교육, 정치 교육, 생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비록 그 교수는 이러한 유럽의 선진 교육이 한국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였지만, 사실 앞서 언급했던 ‘창체’ 시간에 다루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한국의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자기 결정권을 중시하는 성 교육, 다른 이들의 선동에 크게 휘둘리지 않도록 비판 의식을 키우는 정치 교육,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인 환경을 보호하도록 하는 생태 교육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교사와 부모 사이에 점점 커지고 있으며, 관련 도서들이 학교 도서관에 빼곡히 비치되어 있고, 정규 교과 외의 다양한 커뮤니티와 활동들을 통해서도 이러한 교육이 대안적 교육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교육을 분류해서 살펴보자면 결국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세우고자 하는 교육이다. 우선 성 교육의 경우 자신과의 관계를 세우는 자아 교육이다. 유럽의 성 교육은 어렸을 때 생기는 성적인 욕구를 부모나 교회나 학교나 사회의 어떤 권위도 결코 통제하고 억눌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따르면 성적 충동인 ‘리비도’를 사회의 도덕 원칙인 ‘슈퍼에고’가 자꾸 억제하고 억누르며 죄책감을 주면 결국 자아인 ‘이드’가 건강하게 자라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적 본능이 생기면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여 자아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적 욕구가 있으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즐길 권리가 있으며, 성적 지향 역시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성별도 물리적인 성별과 상관없이 스스로 성을 결정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성 전환 수술, 이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성 확정 수술도 원한다면 스스로 결정할 권리와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는 일부 의사들은 성 전환이라는 표현은 기존의 주어진 성별을 전환한다는 의미이기에 잘못된 표현이며 중립적 상태에서 스스로 성을 확정한다는 의미의 성 확장 수술이라고 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정치 교육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세우기 위한 교육이다. 성 교육에서 언급했듯이 정치 교육에서도 절대로 부모, 교사, 사회에 어떤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모든 주장은 주관적인 의견일 뿐이며 결국 그것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스스로 자기 자신이 결정해야 옳다는 것이다. 이는 인식론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이나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지식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인식론에 기인한다. 칼빈 신학교에서 기독교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강연안 교수는 그의 저서 『철학자의 신학수업』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 정신을 ‘포스트-트루스(post-truth)’라고 언급하였다. 말 그대로 진리 이후의 시대, 더 이상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아니 진리는 여전히 존재하나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라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기에 남는 것은 비판 의식을 갖고 분별력을 길러 어떤 말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 교육 역시 성 교육과 마찬가지로 그 중심에 각자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가 되도록 가르친다. 나아가 다른 이들이 내 생각을 좌지우지 못하도록 비판 의식을 갖되 사회 속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기에 서로의 의견에 대해서는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허용하는 관용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최고로 추구해야 할 가치로 여긴다.

마지막으로 생태 교육은 말 그대로 환경과 생태를 보존하는 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이다. 자원의 고갈, 탄소 배출, 기후 문제, 생태계 파괴 등 환경과 관련된 현재의 위기와 문제들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하여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는 교육이다. 따라서 성 교육에 있어서는 어떤 권위도 죄책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반면 생태를 파괴하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유일하게 죄책감을 갖도록 가르친다. 스웨덴의 플룩샴(flygskam: 과도하게 탄소를 배출하는 비행기를 타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의미의 신조어)이라는 단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생태 교육은 다음 세대로 하여금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갖도록 만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생태와 환경을 위하고 보호하는 생태 교육 역시 근원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이다. 생태와 환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유와 동기는 결국 인류의 지속 가능성, 즉 나 자신의 생존이기 때문이다. 생태 교육에서 반복하는 표현은 ‘지속 가능한 미래,’ ‘지속 가능한 사회’이다. 왜 환경과 생태를 보호해야 하는가? 그래야 인류가, 결국 내가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로 인한 멸종을 면하고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바른 자아 정체성을 갖고자 하는 교육, 쉽게 선동 당하지 않고 올바른 기준으로 분별력을 갖는 교육, 생태와 환경을 잘 지키고 보호하는 교육 모두 반드시 필요한 교육이며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 시편 139편에서 보듯이 성경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떻게 지음을 받았고 무엇을 바라고 뜻하며 살아가는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에베소서 6장 4절에서 바울은 부모가 분명 자녀들을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권위를 갖고 가르쳐야 하지만 자녀의 마음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자녀를 사랑으로 품고 마음이 감화되도록 가르쳐야지 권위로 눌러 기계처럼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도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친다. 호세아 4장 6절에 하나님의 백성이 분별력 없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선동당하여 망하였다고 탄식하는 것처럼 성경은 분명히 잘못된 메시지들을 분별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지키고 관리하는 일은 하나님의 청지기인 인간의 당연한 의무이자 책임이다. 창세기 1장 28절과 2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령하셨듯이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발휘하여 온 피조물을 지키고 보호하고 관리해야 한다.

문제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성 교육, 정치 교육, 생태 교육, 즉 나 자신과의, 다른 이들과의, 세상과의 관계를 세우는 교육을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로 세우고자 시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제하고서 각자 자기 자신을 그 중심에 둔 채로 모든 관계를 맺는다. 성을 포함한 자신의 어떤 욕망과 욕구라도 제한 없이 마음껏 발산하여 자아를 찾고자 한다.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판단의 주체이자 기준이 되고자 한다. 겉으로는 고상하게 환경과 생태의 보호를 내세우나 결국 자기 생존, 지속적 미래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로 세상을 도구화한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올바른 자아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나님 없이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세울 수 있을까? 하나님 없이 환경을 돌아보고 제대로 관리하려는 동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나님 없이 남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고 내가 중심에 선 상태에서 남는 것은 끝없는 인간의 욕망, 기준 없이 허공을 떠도는 모순된 소리들, 이기적 동기에서 나오는 타협뿐이다. 오직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마음의 중심에 계실 때만이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 위에 반듯이 자아를 세울 수 있다. 온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말씀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참된 지혜와 지식을 얻는다. 우리 마음의 빈자리를 유일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으로만이 진정으로 이웃을 향한, 세상을 향한 사랑을 품고 섬길 수 있다.

스스로 중심에 서서 자아와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를 세워보고자 하는 교육이 결코 개인의 성공을 위해 끝없이 경쟁하는 교육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이 배제된 상태에서 끝없는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일도, 어떻게든 의미와 목적을 찾고자 하는 일도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처럼 하나님을 배제한 세상이 절망선 아래에서 발버둥치고 있다고 언급하며 그들에게 진정한 자아와 사랑의 관계와 세상 속에서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주시는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육에 있어서도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로 인해 구속된 교육이야말로 하나님 안에 자아를 찾고, 관계를 세우고, 세상 속에 의미와 목적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는, 하나님 없이 방황하며 발버둥치는 교육의 진정한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