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세계 교회사 13] 취리히 종교개혁_안상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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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종교개혁

안상혁 교수(합신, 역사신학)

 

루터의 종교개혁이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되었다면,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취리히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취리히 종교개혁은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개혁파의 강조점과 특색을 잘 드러내었다.

첫째, 연속 강해 설교(Lectio Continua)와 함께 교회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가 95개조를 게시한 후 약 1년 2개월이 지난 후, 1519년 1월 1일, 츠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대예배당의 새로운 시민 사제로 부임했다. 취리히 시민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 곧 ‘연속 강해 설교’를 듣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마태복음 1장부터 주해 설교를 시작하여 일 년 동안 강해 설교를 하고. 곧이어 사도행전과 디모데전서,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 요한복음을 강해했다. 1526년까지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강해한 후에 시편을 시작으로 구약을 강해했다. 모세오경과 역사서 그리고 선지서의 순으로 강해 설교를 이어갔다.

둘째, 공개토론의 방식으로 종교개혁이 진행되었다. 츠빙글리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 진리는 명료해서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는 설교를 들으면 누구나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1523년 1월에 개최된 제1차 공개토론은 이러한 츠빙글리의 기대에 잘 부응했다. 그는 약 600여 명의 대중 앞에서 종교개혁의 원리를 성경적으로 훌륭하게 입증했다. 이날 시의회는 츠빙글리의 설교권을 보장해주었음은 물론 앞으로 도시의 다른 모든 설교자도 반드시 성경에 기초한 진리만을 설교하라고 요구했다. 이듬해 가을, 제2차 공개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이날의 주제는 성화와 조각상을 제거하는 것과 미사의 본질을 규정하는 문제였다. 약 9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다. 실망스럽게도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것을 일순간에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좌절하지 않았다. 츠빙글리의 편에 속했던 누군가 앞으로 모든 설교자는 일정 기간 특별히 이 주제를 가지고 설교할 것을 의무화하자고 제안했다. 자발적인 변화를 위해 성경 말씀을 가지고 회중을 설득하는 시간을 좀 더 갖자는 의도였고, 츠빙글리도 이에 동의했다. 이윽고 설교자들의 열정적인 가르침과 설득이 효과를 발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곳곳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사람들은 교회 안의 각종 성화와 조상들을 제거했다. 내벽에 그려진 성화의 경우는 하얀색의 페인트로 지웠다. 1524년, 시의회는 미사와 성상숭배의 폐지를 공식화했다. 미신적으로 행해지던 촛불 미사, 성인 및 유물숭배와 성지순례 등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중세식의 수도원은 해체되었고 그 재산은 구제와 교육 사업에 건설적으로 활용되었다. 명실공히 취리히는 스위스의 종교개혁 도시로 거듭났다.

셋째, 취리히 성경(Zürich Bible, 1531)이 번역 출간되었다. 1525년 6월, 츠빙글리는 ‘예언학교’(Prophezei)를 개교하여 성직자들을 모아 이들과 함께 성경을 연구했다. 성경 원어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주해하고 설교하는 훈련을 병행했다. 그 열매로서 1531년 신약과 구약을 모두 독일어로 번역한 최초의 성경이 출판되었다. 전체 성경을 원문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루터의 성경보다 3년이나 앞선 것이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츠빙글리 역시 ‘오직 성경’의 사람이었다. 반대자들이 자신을 가리켜 루터의 추종자라고 말할 때, 그는 “나를 루터파라고 이름 붙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에게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르쳐 준 자는 루터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다. 만약 루터가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면, 그는 내가 하는 것하고 똑같이 행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츠빙글리는 성경 말씀이야말로 취리히 종교개혁의 유일한 근거임을 천명했다. 1531년 10월, 츠빙글리는 제2차 카펠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그의 자리를 계승한 불링거는 츠빙글리과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을 교회 개혁의 핵심 원리로 삼아 종교개혁의 과업을 이어갔다.

2023년 1월, 제1차 공개토론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전시회가 그로스뮌스터 예배당에서 개최되었다.

스위스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대예배당의 남쪽 문이다. 흔히 ‘츠빙글리 문(Zwinglitür, 1935~39)’으로 불리며 취리히 도시와 취리히 종교개혁 역사의 주요 24장면을 새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