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12] 역사 속에서: 루이13세_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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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루이13세

역사는 곧게 흐르지 않는다. 푸른색에 비슷한 색깔이 이어지는 대신에 어이없게도 누런빛이 세력을 떨치기 일쑤이고, 시세가 동쪽으로 흐르는 듯이 보이다가 기가 막히게도 갑자기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쯤은 예삿일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한 치라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 지구의 한 구석에서 불거진 감염병이 짧은 시간 안에 세계를 강타하여 죽음의 계곡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까닭에 예측불허의 미래 앞에서 현재는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역사의 맥락에는 연속, 발전, 계승, 보강 같은 순리현상들도 나타나지만, 변경, 전복, 단절, 무효화 같은 이상현상들도 심심치 않게 자주 발생한다.

역사가 곧게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 실례는 루이13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루이는 부왕 앙리4세가 파리 한복판에서 암살자의 단검에 찔려 피살되는 바람에 고작 아홉 살의 나이로 얼떨결에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루이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다시 가톨릭으로 급선회하였다.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가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으므로 루이는 자연스레 신교 신앙보다는 구교 신앙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후 마리가 섭정을 맡으면서 국정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한층 더 가톨릭 성향으로 기울어졌다. 초기에 마리는 부군 앙리4세의 낭뜨 칙령을 존중히 여기는 듯하였고, 루이도 성년이 되었을 때 부왕의 유지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때가 이르자 국정의 종교 색깔은 뚜렷하게 가톨릭으로 바뀌었다. 낭뜨 칙령과 함께 시작되었던 위그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주일마다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꿀처럼 달고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시편으로 하늘의 찬송을 부르는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교육을 받으러 학교에 다니고 공직에 진출하며 법정에서 권리를 보호받는 것도 다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위그노 정치가들과 공직자들은 퇴임을 강요당하였다. 프랑스 전역에서 자유롭게 믿음의 삶을 누리려던 위그노의 푸른 꿈은 삽시간에 좌절되었다. 대신에 위그노에 대한 혐오와 박해가 자동적으로 불처럼 번져나갔다.

위그노를 옥죄는 반대 세력의 발걸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빠르고 세졌다. 예를 들면, 위그노 지도자들의 행동반경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618년 늦가을에 네덜란드 도르트레히트에서 아르미니우스 항론파 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가 열렸다. 프랑스 총회는 샤릉똥 교회의 뒤물랭을 비롯해서 리베, 샤미에, 쇼브, 네 명의 목사를 대표로 파송하였다. 바로 이때 가톨릭과 항론파의 부추김을받은 루이13세는 이들에게 출국금지령을 내렸다. 국경을 넘다가 체포되는 날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금지령 앞에서 목사들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도르트레히트 회의는 이들의 불참을 아쉬어하면서 프랑스 교회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네 좌석을 비워두었다.

왕궁을 등에 업고 압박의 칼날을 휘두르는 가톨릭에 대항하여 위그노가 여러 곳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가톨릭 세력은 위그노의 항쟁을 뿌리 뽑을 목적으로 위그노의 경제와 군사 거점 라로쉘을 공략하였다. 라로쉘은 프랑스 중부 서쪽에 위치한 항구로 대서양을 운항하는 온갖 배들이 정박하는 도시였다. 1627년 8월부터 이듬해 10월 28일까지 무려 14개월 동안 라로쉘은 공성을 당하였다. 루이13세가 위그노 타도에 앞장세운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항구에 1.2km나 달하는 철책을 설치하여 라로쉘을 완전히 봉쇄하였다. 라로쉘의 쟝 귀똥 시장은 결사항전을 맹세하였지만, 2만7천 명의 시민 가운데 5천 명밖에 생존하지 못하자 무조건 항복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부왕 앙리4세가 위그노에게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선사한 낭뜨 칙령의 살진 암소는 아들 루이13세가 칼과 채찍으로 사육한 흉한 암소에게 삼킴을 당하고 말았다. 역사는 곧게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위그노 박해의 역사는 이쯤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첫째 화는 지나갔지만 둘째 화가 이를 것이다. 루이13세의 망토 속에 루이14세가 “태양 왕”이라는 참람한 이름으로 위그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